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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월 15일

오클랜드 천문 동호회(Auckland Astronomical Society)는 행사가 참 많다.
같은 취향을 가진 소수정예 멤버들이 조용히 별을 보는 야간비행과는 참으로 다르다

매주 다른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매월 첫째주는 천문학 강의, 둘째주는 사진 세미나, 셋째주는 안시 세미나, 넷째주는 Space movie 상영 이런 식이다)
크고 작은 스타파티도 있고 종종 공개관측회도 한다.

그래서 Staff이 많이 필요한데..
지난번 스타파티 이후, 
회비 담당, 행사 담당, 월 회지 편집 등 여러 분야에서 동호회 staff 추가 모집을 하길래 
뭐라도 껴 보려고 모집 공지를 읽고 또 읽어봐도 
Native가 아닌 외국인이 낄만한 자리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립서비스라도 하려고
동호회 회장님께, "기회가 있으면 동호회에 뭔가 좀 더 기여를 하고 싶다"고 그냥 던졌는데
대뜸 "그래 그럼 이번달 안시 세미나 니가 맡아~"
아 아니 그게 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

무슨 핑계를 댈까 궁리하는 중에
동호회 홈페이지에 바로 공지가 올라왔다

15 May practical.jpg

일주일 남기고는 잠도 안 오고 소화도 안 된다
되는대로 벌려놓고 나서 허덕대며 근근이 수습하며 사는 것은 
한국에서든 뉴질랜드에서든 평생의 업인가 보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나..
회원 몇 분께 고민을 얘기했더니 비슷한 얘기를 한다
"네 영어는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은 하니까, 우리가 꼭 귀담아 들어야 할 가치 있는 얘기를 해주면 돼"
아니 그게 더 무섭잖아..

주제는 봄 여름 별자리와 그 안의 Deep-sky 대상들.
말빨 만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
그나마 잘 다룰 줄 아는 PPT를 아주 열심히 만들었다. 

===========================================================

그리고 며칠 후, 30여명의 오클랜드 천문동호회 회원들 앞에서 
50분동안 별보는 얘기를 떠들었다
전갈자리, 궁수자리, 처녀자리 별자리와 
거기에 관련된 뒷 얘기들(수메르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그 안의 보석들에 대해서.

SCO.JPG

모든 강의에서 최소한 10분에 한번 이상 청중을 웃겨야 한다는게 내 신조인데
영어가 짧아서 충분히 (내가 만족할 만큼) 웃기지 못한게 아쉽다

네이티브 영어 중에선 할아버지 영어가 제일 알아듣기 어려운데
강의 중에 말 많은 할아버지의 질문들을 못 알아들어서 다른 사람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어쨌든, 딱 준비한 만큼.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만 보여주었다
갑자기 방언이 터져서 노력도 안했는데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어쩌다가, 나도 모르게, 운좋게"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실은 혐오한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별을 보는 일이나 말을 배우는 일이나
준비한 만큼만 성취할 수 있고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2. 6월 19일

이번학기 과목 중에서는 Accounting(회계)이 있다.
어카운팅은 내가 회사에서 마케팅&영업 10년 했던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과목이었다.

어카운팅 기말고사가 다가올수록 점점 초조해지고 짜증만 늘어간다. 
혹시라도 Fail을 하게 되면 뒷감당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같이 공부하는 여러 나라의 학생들도 모두 초긴장.. 

그 와중에, 시험 보고 나서는 바로 그날 저녁에 
오클랜드 천문동호회에서 30분짜리 강연을 해야 했다. 

19 June Planetarium.jpg 

지난달의 PPT 강연과는 달리 깜깜한 플라네타리움에서 별자리 보며 포인터만 들고 하는 거라 
내가 즐겨 쓰는 (때로는 의존하는) PPT도 제스쳐도 쓰지 못하고, 
오로지 목소리 만으로, 그것도 영어로 백인 형님들에게 가치 있는 무언가를 전달하고 
또 때로는 (at least 10분에 한번씩은) 웃겨줘야 한다. 

한국에서도 플라네타리움 강연은 강의 청탁이 올 때마다 모두 거절했었다. 
별자리 가지고 떠드는게 좀 시시하다고 생각했고, PPT빨(?)을 세울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빼지 말고 할 걸 그랬네.... 
기회는 많았는데 ㅠ_ㅠ

플라네타리움 세션 날짜가 기말고사 날짜와 겹치는 것을 알게 되고서도, 
도저히 
“시험 때문에 못 하겠어요” 라고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엔 명확한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매일 시간을 반으로 쪼개서 4시간은 어카운팅 공부를 하고
한 2시간은 또 플라네타리움 스피치 준비를 하고... 다시 반복 또 반복.
그렇게 보름여를 보냈다

처음에는 다 외워서 하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말로 한다 해도 그건 못하겠다.

대신, script을 공들여서 만들었다.
플라네타리움 내레이션은 어딘가에 앉아서 준비한 내용 보면서 해도 될테니까 말이다.
여러 영어 쌤들한테도 표현 괜찮은지 몇 번씩 확인을 받고..

================================================================

6월 19일 아침, 
두 시간 동안 미친듯이 어카운팅 final exam 답안지에 무언가를 갈겨 썼다.
그리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바로 발표 모드로 전환.

플라네타리움 쇼를 보며 누워 있다가 푹 잤던 경험은 많지만 
이걸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해본 적은 처음이다

Stardome Observatory의 플라네타리움 오퍼레이터인 
John 아저씨와 한참을 합(?)을 맞추고 나서,

Planetarium1.jpg

회원들이 속속 입장하고
곧 플라네타리움 세션이 시작되었다

Planetarium2.jpg

수십번 연습했던 speech. 침착하게, 감정을 담아서....
Around the midnight, there is a large triangle in the northern sky.... 

남반구, 남위 37도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북쪽 지평선에서 한겨울(계절이 북반구와 반대다)이나 되어야 가까스로 보일 
여름의 대삼각형과 그 친구들을 30분 동안 설명해 주었다

영어도 잘 못하는 애한테 세미나 발표를 맡긴 이유는 
그들이 잘 아는 것 말고 무언가 다른 얘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웃음 포인트가 달라서 계획만큼 빵빵 터지진 못했지만 
10분에 한 번 웃기기도 어느 정도는 성공.

휴.. 어카운팅 기말고사부터 플라네타리움 발표까지, 
길고 길었던 6월 19일도 대략 수습이 된 것 같다



#3. 항상

다니고 있는 학교의 마케팅팀에서 인턴으로 일을 하고 있다
신입생 모집을 위해 전세계 유학원을 대상으로 시장조사를 하고 홍보 자료를 만들고
통계 분석을 하고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고..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는 사원 대리 후배들 시켰을 서류 정리도 열심히.

마케팅 플랜을 만드는 것도 PPT나 엑셀질을 하는 것도 
일이야 늘상 하던 일이니 누구에게도 꿀릴 것이 없는데
모든 일을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다
매일 매일의 업무가 새로운 도전이다.

매일 매일 넘다 보면 조금 쉬워질 날이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4. 6월 24일/30일

뉴질랜드에는 마타리키(Matariki)라는 나름의 전통 명절이 있다.
Matariki는 뉴질랜드 원주민들인 마오리족 언어로 플레이아데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1년 내내 북쪽 하늘에서 마타리키가 보이다가,
5월말부터 6월말까지 한달 정도만 태양 근처로 숨는다.
그러다가 새벽녘 북쪽 지평선에서 마타리키가 다시 보이면 
뉴질랜드 원주민의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Maori New Year)

마타리키를 기념하기 위해 오클랜드 여기저기서 행사가 있는데,
오클랜드 천문 동호회에서도 그중 몇 개 행사에서 
공개 관측회(Public Telescope Viewing)를 진행했다

한국에서는 누군가 내게 공관 지원해 달라면 들은 체도 안했었지만 
얼굴도 이름도 알려야 하는 듣보잡 외국인이니 시간 될 때마다 얼굴을 들이밀어 보기로 했다
(또한 동호회 회원들 중 내 망원경이 제일 크고 폼이 잘 나는 편이라.. 
 공관에서 나보다는 내 망원경이 필요하기도 했을 것이다)

망원경을 설치하니 다양한 피부색과 연령대의 시민들이 줄을 선다
5시간 동안 토성 목성 보석상자(NGC 4755) 토성 목성 보석상자 무한 반복.

Smales Farm.jpg

북반구나 남반구나, 인종 성별 연령 관계 없이 
전 인류는 토성으로 하나가 된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나도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아! 이런 맛으로 공관을 하는 거였나?
별을 본지 25년 만에, 나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4. 6월 25일

뉴질랜드 한인 사진가 협회의 회원 한 분을 우연히 알게 되어서,
협회 정모에서 초청강연을 하게 되었다.

평생 안시관측만을 하고 안시관측 책을 낸 사람이
사진 동호회에서 천체사진을 주제로 강연을 하다니...
내 입장에서는 플라네타리움에서 영어로 진행을 하는 것보다 더 깜깜한 일이었다

DSLR 셔터도 누를 줄 모르는 애가 ISO를 어떻게.. 인터벌을 어떻게.. 
어줍지 않은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는
언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준비해야 어떤 별을 보고 찍을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한사협1.jpg


강연을 마치고는 날씨가 좋아서 천체관측 맛보기도 한 번.

한사협2.jpg

20년 이상을 여기서 살고 계신 교민들께도
인생의 새로운 기쁨을 전달해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뿌듯하다. 

똑같은 얘기를 한국말로 전달하면 이렇게 쉽고 맘 편한 것을.. 



#5. 6월 26일

다음날, 
시험과 강연과 봉사와 업무와 각종 급한 일들이 끝난 기념으로 
오클랜드에서 100km 떨어진 해변, Pakiri beach에 관측을 갔다
해운대만한 넓은 백사장에.. 사람은 한 명도 없다

pakiri.jpg

겨우 100km 이동했을 뿐이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검은 하늘과 머리 꼭대기의 은하수와 남천의 대상들을 볼 수 있었다

하늘 높이 남중한 전갈의 꼬리에는 메시에 7번이 육안으로도 마치 작은 메시에 구상성단처럼 빛난다.
97년 헤일밥을 보러 갔던, 지금의 천문인마을이 위치한 곳에서 만났던 전갈, 
정말 구상성단인줄 알았던 그 7번이 다시 생각이 났다 
(그 때는 경험 부족으로 정말로 구상성단인줄 알았다)

한국에서는 안시관측으로는 거의 말도 안 되는 극강의 도전대상에 불과한 
Pipe nebula와 Prancing horse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늘에 떠 있다.

Prancing.JPG

천정을 관통하는 은하수는 화선지에 수묵 담채를 그려놓은 듯.. 
인제에서 맑은 날 보던 초롱초롱한 은하수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필드에서의 스케치 시간을 줄이려고 
틈틈이 집의 Backyard에서 오메가 센타우리(NGC 5139) 밑그림을 그려왔는데
Dark sky에서 5139를 다시 보니.. 
도저히 그릴 수가 없다. 이걸 무슨 수로 표현하나? 그저 헛웃음만.

너무 많은, 너무 과한 아름다움.
관측이, 스케치가 다 무슨 소용인가... 스케치북을 열어 보지도 못했다

17번, 20번, 8번. 잡는 대상마다 낮은 탄성이, 또는 탄식이 나온다
강원도에서 스케치 하면서 한두시간 동안 집중해서 보던 것보다
필터도 없이 주변시도 없이 그냥 슥 곁눈질로 보는 것이 더 잘 보이니..
메시에 스케치를 몽땅 다시 해야 할 판이다.

혹시나 하여 필터를 끼워보니 
그간 여러 번의 시도에도 흔적도 보지 못했던 
M8 내부의 Black Comet, Barnard 88번이 보인다.

B88.JPG

이거, 진짜로 보이는거 맞네.

은하수가 너무나 화려해서 암흑성운들을 찾아 보았다. 
B86번, B72번을 지나 B92번.
잡는 순간 자동으로 감탄사가 나왔다.
아....
B92.JPG 

은하수 쪽의 어떤 대상을 잡아도 너무나 엄청나서, 
나중엔 망원경을 들이대기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내가 25년동안 그렇게 열심히 보던 별들이 다 뭐였었나... 하는 허무함에 
모든 별짓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쪽 밤하늘 공부를 충분히 하지 않아서 무얼 봐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도 
망원경에 손이 잘 가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자정이 넘으니 내가 월요일에 플라네타리움에서 핏대를 세우며 떠들었던 여름의 대삼각형이 
북쪽 수평선 위에서 떠올랐다.
거친 파도 소리와 함께 보는 대삼각형. 
마치 고향집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고도 20도에서는 얼마나 보일까 고리성운을 잡았다.
500배로 배율을 올리니.. 약간의 노력으로 중심성을 찾을 수 있었다.
어두운 하늘의 중요성.


결국, 스케치도 한 장 하지 않고
그냥 사탕 바구니를 앞에 둔 어린이처럼
밤새도록 이성단 저은하 만져만 보다가 새벽 4시쯤 집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집 데크에서 새벽 6시쯤 북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 높이 금성 아래.. 지평선 위쪽으로 고도 10도 쯤에 마타리키, 
아니 플레이아데스가 뉴질랜드의 새해를 알리고 있었다. 



공부하는 것도, 일하는 것도, 별을 보는 일도, 별 가지고 떠드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 잘할 수밖에.




                Nightwid 無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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