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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만 쳐다보고 살던, 

초딩 시절부터 천문학 서적에 빠져 살던 고등학생이

'너 그러다 굶어 죽는다'는 담임쌤의 진학지도에 천문학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대신 생전 처음으로 밤하늘로 고개를 돌려서 

서울의 집 옥상에서 여름밤의 대삼각형을 찾아보기 시작한지 23년이 되었다


오랜 기간 한 해도 쉬지 않고 별을 보면서..

이것만은 절대로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여러 선배들이 관측의 왕도라고 추천하지만 정작 그 형님들도 잘 하지 않던 (쉽지 않으니까)

천체 스케치를 시작한지도 7년이 흘렀다


2009년 여름 벗고개에서 어설픈 솜씨로

메시에 스케치 첫 대상인 17번을 스케치하며 느꼈던

그 짜릿한 깊은 맛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M17_.jpg 

그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던 각종 별일들을 모두 중단하고

메시에 대상만 다시 보고 그리는 일에만 7년을 보냈다


내가 그동안 스케치 하기 전에 보았던 것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아까우니까!

하지만 메시에 스케치를 했던 7년 동안

예전에 충분히 볼 만큼 보았다고 생각했던 익숙한 대상 안에서도 

너무나 많은 것을 다시 보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회사 업무의 압박과 굼뜬 손놀림으로 1년에 10개도 채 그리지 못하다가

작년에 김태환님이 제작한 EQ 플랫폼을 들인 후 단 1년여 만에

그간 지지부진하던 진도를 대략 6배의 속도로 모두 일소하고

이제 110개의 대상 중 딱 한 개만을 남겨 놓았다

M24번.

우연히 남은 것은 아니었다

도저히 그릴 엄두가 나질 않아서..

24사진.jpg


아 대체 이걸 어떻게 그리나?

매년 미루고 미루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또한 7월 관측주간 중 하루에는 KBS스페셜 ‘한국의 과학과 문명’ 다큐멘터리 팀과 동행 촬영이 약속되어 있었다

PD님, 작가님과 수시로 카톡을 주고 받으며 촬영일을 잡았지만

연간 가장 별을 보기 힘든 장마철의 하늘이 그리 쉽게 열려주진 않았다

하지만 지난 스물 몇 해의 기억을 회상해 볼 때 

장마 기간이라고 월령을 그냥 공치고 지났던 해는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태풍 전후의 맑은 하늘에 대한 기억이 더 강렬하다.


계획했던 촬영일을 미루고 또 미루고.. 달도 그믐에서 초승으로 바뀌고

드디어, 미국 어플인 웨더채널에서 금요일 밤 맑음 예보가 떴다. 

512_웨더채널만큼해라.png 


그러나 대한민국 기상청 예보는 계속 흐림.

당일 아침이 되어도 기상청 예보는 변함이 없다

512_망할기상청.png 


위성 사진도 안 보나.. 슈퍼컴은 대체 무슨 용도로 쓰는 것일까.

위성사진.jpeg 


벌써 달이 커지고 있는데..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번개 공지를 올렸다

(야간비행 화면 캡쳐)
번개 공지.JPG



촬영팀은 우리 집에서 망원경 옮겨싣는 것부터 찍을 예정이라,

약속된 시간에 조용한 아파트 주차장에 KBS 딱지가 붙어 있는 밴이 한대 들어오니 

지나가던 주민들이 무슨 사건 사고라도 났나 모두 한번씩 쳐다보고 가신다


※ KBS의 ‘한국의 과학과 문명’ 4부작 다큐멘터리 중에 3편이 천문에 관련된 내용이고,
  3편 내용은 고구려부터의 고천문 내용부터 천문연에서 건설 중인 GMT까지
  과거부터 미래까지 이어지는 천체관측에 대한 내용 중에 한 꼭지로 
  현대의 별쟁이는 무엇을 하는지?를 다룰 계획임


장비를 꺼내고 차에 옮겨 싣고 춘천고속도로를 달리고 인제 관측지에서 장비 세팅하고 

왜 별을 보는지 인터뷰도 하고 까만 종이에 점 찍는 것까지 찍었는데.. 

과연 얼마나 나올지는 방송을 봐야 알겠지!


(김남희님 인터뷰 중)
800이너뷰.jpg 



기상청 예보는 끝까지 굳건히 구름 많음이라 사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해가 지기 전부터 하늘빛이 심상치 않더니

박명이 되고 나니 엄청난 하늘이 펼쳐졌다

백조자리를 흘러가는 은하수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본 적이 있었나....

백조의 갈라진 은하수 조각 디테일이 호주 아웃백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황홀한 은하수를 넋 놓고 구경하는 와중에도 초저녁부터 끝없이 이슬이 내린다.

20여년의 관측일 중에 손에 꼽을 정도의 이슬 폭탄이었다 (은하수도 물론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이슬이 내리건 말건, 오늘은 무조건 24번을 끝내야겠다.

9시 조금 넘어서 박명 완료와 함께 촬영을 마치고, 조명을 끄고 관측 시작.

이슬 폭탄과는 어울리지 않게 시상도 너무 좋다.

아~~~~ 이걸 언제 다 그리나..

점 하나 하나, 하던대로 그저 미련하게 

그 점들의 위치와 밝기를 하나씩 확인하며 최선의 위치에 찍어 나간다

셀 수 없는 깨알들은 그냥 작은 점으로 대략적인 위치에 탁탁탁..


24번 점찍기가 두 시간이 넘어가니 머리가 어질어질 하다. 

그러나 아직 그려야 할 별들의 1/5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서쪽으로 24번이 넘어가기까지 이제 3시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인제 관측지는 남서쪽의 산이 꽤 높다)


금요일이라 밤 늦은 시간에도 한달 내리 별을 보지 못한 굶주린 별쟁이들이 퇴근 후 속속 도착하는데,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냥 무식하게 하나씩 보듬어가며 점을 찍다가는 

남은 3시간이 아니라 30시간이 걸려도 다 그릴 수가 없을 것 같다

별도 워낙 많아서 관측하고 점을 찍고 다시 아이피스로 돌아오면 내가 어딜 그렸는지도 한참을 찾아야 하는 정도.

은하수 속의 작고 아름다운 산개성단 NGC 6603도 만들어 주고 

6603.JPG


이름 없는 작은 별무리들도 하나씩 빚어 주고..

별무리들.JPG


초 집중을 유지하며 다시 한 시간을 더 점을 찍고 나니,

24번을 관측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은 2시간.

그러나 아이피스로 보이는 모습과 스케치북 위의 대상과의 싱크로율은 40%미만.

이제 때가 되었다.

600이럴줄알고.JPG 

혹시 몰라서 (이럴줄 알고)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 파스텔 갈이를 꺼냈다

800파갈이.jpg 


M24번의 잔별들을 도저히 다 점으로 찍을 수가 없어서 

파스텔 가루의 진하기를 조절하여 농담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결정.


생각보다 많이 갈린 파스텔 가루에, 지켜보던 남희형님과 PD님이 그림 망칠까봐 걱정했지만

지우개 찍기 신공으로 겨우 톤을 맞추고..


24번 관측종료 1시간 전, 지우개를 잘라서 

모든 신경을 손 끝에 집중하여 Barnard 92번과 93번 암흑성운을 만들었다

92_93.JPG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암흑성운인 92번을 내 손으로 만드는 순간을 얼마나 많이 상상했던가.

천지를 창조하셨던 분도 이런 희열을 느꼈을지 모른다.


성운도 성단도 은하도 아닌 은하수 조각인 24번을 

5시간에 걸쳐서 그렇게 바보같이 하나씩 정성들여 하얀 점을 찍었던 이유도

B92번 암흑성운을 더욱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한 밑그림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과하지 않게.. 딱 보이는 만큼만. 

(보이는 것보다 더 멋지게 그리고 싶은 욕망은 정말로 참기 어려운 유혹이다)


그리고 Barnard 92번 암흑성운의 화룡점정이자 Messier 24번의 가장 중요한 별인 B92 내의 11등성을 

온 정신을 집중하여 찍어 주었다. 

검은 호수에 떠 있는 하얀 섬 하나! 

92.JPG 


지난 수피령에서의 관측을 더하면 도합 6시간만에 

메시에 24번을 완성했다

M24_Ori_160708.JPG


(Description)
24_des.JPG


해도 지기 전부터 끊임없이 내리는 이슬 폭탄에 두꺼운 스케치 용지마저 이미 물걸레가 된지 오래고

내 능력으로 더 이상의 표현은 불가능하다 생각하여 

지우개와 젤리펜을 놓고 서쪽 하늘을 보니 M24는 서산으로 넘어가기 직전.

EQ를 돌리며 그냥 아이피스에 가만히 눈을 대고 있으니

얼마 뒤 서산 능선의 나뭇가지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무엇이 무엇을 가리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Nightwid. 

(아동심리를 전공한 마나님의 소견으로는 자폐 아동의 증상 중 하나라고..)

그 나뭇가지들이 서서히 24번의 별들을 삼키는 모습을 그냥 지켜본다

별과 나무는 어찌도 그리 잘 어울리는 것일까?


(나무의 역습 by 조강욱)
tree_movie.gif



2009년부터 7년에 걸친 메시에 스케치가 드디어 완성을 보았다

무언가를 시작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끝내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연한 인생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계획하고 있는 다음 프로젝트도 

또 이와 비슷한 미련한 반복과 수없는 시간이 소요될지 모른다

아니 아마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성도도 볼 필요 없는 익숙한 메시에 스케치 하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하지만 내가 천체관측이라는 아름다운 일에 평생토록 지치지 않을 동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더 아득하고 이상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모는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언젠가 오랜 뒤에 지구별의 어딘가에서 잠들기 전에, 

꼭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주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평생을 노력할 것이다.


조만간 메시에 1번부터 110번까지 하루에 한 편씩 별 보는 얘기를 올려 보고자 한다.

이렇게라도 정리해 놓지 않으면 

나의 7년간의 소중한 시간과 기억은 M1 게성운의 가스가 소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날아가 버릴 테니까.


그간 저의 메시에 스케치 완주를 응원해 주셨던 수많은 별친구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Nightwid 無雲






※ 그날 촬영했던 화면은 7월 28일 목요일 밤 10시 KBS1 ‘한국의 과학과 문명’ 3편에
   여러 별친구들과 함께 ‘살짝’ 나올 예정입니다 ^^;;;;
?
  • 이수웅 고문 2016.07.13 10:47
    110놈을 다 스케치하셨다니 그 열정 대단 하십니다.
    그리고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kbs PD 까지 감동 시켰으리라 믿습니다.
    7월 28일 달력에 동그라미' 조강욱'이라고 표시해두었습니다

    짱입니다.
  • 조강욱 관측부장 2016.08.16 22:34
    고문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110개 다 그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 인천/김주영 2016.07.13 14:20
    잘 봤습니다. 내년에는 110개 모아서 천체사진전 내실 것 같은.. 저도 분발 좀 해야겠습니다.
    후학 좀 양성하시지요. 올해 스케치 두명 냈다는 소문이..;;
  • 조강욱 관측부장 2016.08.16 22:35
    그러게요.. 내실 만한 분들이 많은데..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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