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북극권 원정 - #5. 3~4일차(키루나-아비스코) : 태초의 얼음 호수
2015. 5. 4 (月) 조강욱
1. Prologue : 모든 것의 발단
2. 원정 준비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원정
3. 1일차(서울-키루나) : 라플란드로 가자
4. 2일차(키루나) : 오로라와의 조우
5. 3~4일차(키루나-아비스코) : 태초의 얼음 호수
6. 5일차(나르빅-키루나) : 폭풍의 하늘
7. 6일차(오슬로-스발바르) : 뭉크를 찾아서, 북극을 향해서
8. 7일차(스발바르) :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9. 8일차(스발바르-오슬로) :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시공간
10. 9~10일차(프랑크푸르트-한국) : 10일간 비행기 10번 타기
11. Epilogue : 진인사대천명
============================== 3일차 ==============================
이미 2시간도 더 전부터 박명은 시작 되었으나
[ 새벽의 여신 & 새벽, 갤럭시노트4에 터치펜, 스웨덴에서 조강욱 (2015) ]
태양은 내가 자러 들어간 후 6시 10분에서야 떠올랐다
새벽부터 시작된 느린 여명.. 이 곳 사람들이 느긋한 이유 중에 하나일까?
누가 보면 빙산인줄..
그냥 눈 무더기에 아침 첫 햇살이 비친 모습이다
6시 취침 후 조식뷔페 시작 시간에 맞추어 7시 30분 기상한 의지의 한국인들
여기 한 명 추가요
실은 전투식량이나 라면 말고 제대로 된 식사가 하루 한 번, 조식뷔페 뿐이라..
1일 2식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소중한 식사. 더 이상 안 들어갈 때까지 위 속에 꾹꾹 밀어넣고
배 꺼지기 전에 딴짓 안하고 바로 다시 취침!
정오가 지나 일어나서 하늘을 보니 오늘도 맑다.
오늘도 예보는 밤새 맑음..
아니 북유럽이 원래 이렇게 날씨가 좋았나?
오늘은 어제보다 오로라 예보도 더 좋다
(우리는 이런 오로라 어플을 몇 개 깔아놓고 매일 매일 확인했다)
원정 출발 전부터, 날 좋을때 하루 정도는 100km 북서쪽의 아비스코(Abisko) 국립공원에 가서
오로라 관측을 하기로 했었다
아래 지도 상단에 보이는 Tornetrask 호수에 비친 오로라가 그렇게 멋지다는..
내일까지도 예보가 낮이고 밤이고 계속 무려 맑음이라
관광객이 더 적을 내일(월요일) 렌터카 빌려서 무박 2일로 아비스코에 다녀오자.
렌터카 구하는 것은 미리 예약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은데,
여기서도 수동기어가 말썽이다
키루나에서 차를 빌릴 수 있는 6~7군데의 렌터카 회사를 검색해봐도
수동기어 차량은 수십대가 나오는데
오토차는 단 한 대도 찾을 수가 없다
아니 북유럽에는 수동 매니아만 사나!
(위 사진 제목 : 수동적인 삶, 북유럽)
웹상에서 한시간여를 찾아 헤멘 끝에 겨우 대여 가능한 오토 차량을 한 대 발견.
가격이고 옵션이고 따질 겨를도 없이 무조건 예약했다 (폭스바겐 파사트 or similar)
대학생때 운전면허 학원비 4만원 아낀다고 오토 면허를 딴 것이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다
오늘도 장을 보러 시내로 출동.
나온 김에 구글 지도에 의지해서 시청도 함 구경하고
키루나는 철광석 산업을 위해 20세기 초에 형성된 도시다
그래서 이 척박한 땅까지 2만명이나 사람이 사는 것인데.. 오랜 채굴로 인해 심각한 지반 침하를 겪고 있다고 한다
도시 곳곳에 거대한 싱크홀이 만들어지고,
키루나 시의회에서는 주변 지역으로 도시를 통째로 옮기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눌러야 바뀌는 신호등
몹쓸 아저씨의 사진찍기 놀이
저 무거운 카메라와 캠코더를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는 진정한 작가님
저녁밥은 라면에 샐러드. 저염 이한솔 선생께서 반스프 신공을 시전하심
오늘은 조금이라도 오로라 관측 시간을 늘리기 위하여 안 자고 8시 천문박명 시각에 맞추어 관측지로 출동!
그런데.. 이게 웬일.
항상 칠흙같은 어둠으로 우리를 맞아주던 겨울왕국 숲 속에
강남역보다 더 촘촘하게 가로등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대체 이건 뭐지!
리셉션에 가서 불 꺼달라고 따졌더니 밤 10시에 자동 소등이 된다고 한다
그동안 관측지 출발 시간이 10시 이후로 늦어서 가로등 켜진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구글 지도로 10시까지 임시로 관측할 곳을 급 검색하여
눈밭을 20분여 이동하여 캠핑 사이트를 찾아갔는데..
하늘도 밝고 오로라도 너무 조용하다.
그냥 우리 관측지 불 꺼질 때까지 잠이라도 더 자야겠다
왜 그런지 오늘따라 몸도 더 피곤하여 미련없이 숙소로 직행.
.......................
일어나보니 벌써 10시 40분.. 늦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오로라부터 확인했는데
다행히도(?) 아직은 조용하다
밤 11시, 다시 우리의 관측지에 도착하니
동쪽 하늘에 오로라가 스윽 나타난다
오늘도 오로라 열차가 달려줄까..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졸다 보니 카시오페이아 쪽에도 오로라 가루가 나타났다
사실 Cass도 북극성도 워낙 천정 높이 있어서 북쪽 하늘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로라는 하늘을 돌면서 약하게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
[ 김동훈 作, 쉬는 것도 하늘 뜻대로 ]
이 오로라 씨앗이 조금만 더 발동 걸리면 어제처럼 열차도 커튼도 될텐데..
날씨도 그리 춥지 않은데 몸이 으실으실하다. 몸살인가..
근데 나만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세명이 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
며칠간 쉼없이 달렸더니 하루 쉴 때가 되었나보다
자정을 지나며 그나마 희미하던 오로라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대박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12시반, 짐 챙겨서 다 같이 철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앞으로 남은 이틀간의 오로라 관측을 위해
정말로 적절한 타이밍의 휴식이었다
기가 막힌 하늘의 배려를 감사하며..
숙소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4일차 ==============================
정말로 글자 그대로 꿀맛 같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것도 새벽같이)
새벽 5시 반. 어느새 몰려온 구름에 하늘이 불타고 있다
이번 원정도 역시 수면 부족과 싸우고 있다. 우리가 자러 온 것은 아니니깐..
이 와중에 어젯밤에도 김동훈님은 그간 찍은 사진 정리하느라 2시간밖에 못 주무셨다는..
성장 촉진 시간
평일은 조식 시작시간이 1시간 빠르다. 6시 반에 문 열자마자 식당으로
일용할 양식들
북극에도 택배는 온다
원정 속의 원정, 아비스코 관측 포인트 점검 중
원래는 오로라 관광지로 유명한 스키 리프트 정상에 가려 했으나
밤에 4시간 밖에 체류할 수 없고 (숙박 불가) 가격도 쓸 데 없이 비싸서 포기.
그런 안락한 정규 프로그램은 관광객들이나 하라고 하고
우리는 선수용 관측지를 찾아봐야겠다
한참 구글맵을 뒤지다가 아비스코 국립공원 경계 위치에 한솔형님 추천으로 쓸만한 곳을 발견.
로밍폰 통신망이 끊길 것을 대비해서 아예 키루나-아비스코 지역의 구글지도를 통째로 폰에 다운받았다
렌터카 대여 시간은 오후 1시부터.
차 빌리러 도보 한시간 거리를 키루나 시내를 횡단해서 가야 한다
동훈형님과 둘이서 구글 지도 켜 놓고 차 찾으러 출발.
흔한 설국 풍경
여긴 한국의 눈 안 치운 언덕길 분위기
한국 아줌마들 사이에서 대 유행인 장바구니 캐리어.. 여기 아줌마들은 썰매를 끌고 다닌다
눈은 이 정도는 치워야..
(그러고보니 북극까지 현대차가..)
나는 걷는다
40분쯤 걸으니 시 외곽의 나름 큰 쇼핑센터가 보인다
인구 2만 소도시에 이런 쇼핑센터가 운영될까.. 쓸데 없는 걱정.
Clas Ohlson이라는 생활용품점에서 휴대용 손저울을 하나 샀다.
출국할 때는 23kg에 맞추었던 짐을
낼모레 새벽에 스발바르로 떠날 때는 가방 하나에 20kg으로 모든 짐을 조정해야 한다
멀다 멀어. 쇼핑 하느라고 계획한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어버렸다
한시간이 넘게 걸어서 허름한 공장지대에 위치한 렌트카 사무실에 도착.
사무실에 들어가니 콧수염 아저씨가 '너네한테 파사트 말고 콰트로 OOOO를 줄거야' 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분명히 격한 함성을 기대했을텐데..
나와 동훈형님이 '그게 뭔데요?' 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니
실망한 표정으로 '아니.. 새 차 준다고.. ㅡㅡ'
'아 예..'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S전자 마케터와 운전에 관심 없는 H자동차 연구원은
뭐라 리액션을 하면 좋을지 결국 찾지 못했다
키를 받아들고 나가 보니 진짜로 새 차.. 그것도 아우디가 서 있었다
우워~~ 차와 운전에 전혀 취미가 없는 나도 유일하게 선망하는 차가 있다면 바로 아우디이다
특히 그 아름다운 뒤태는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렌다.
스웨덴까지 와서 아우디 함 몰아보겠네~~ 했는데
우리 둘이서 아무리 연구해도 시동을 어떻게 거는지 찾을 수가 없다
한 10분 넘게 낑낑대다가 모양 빠지게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콧수염 아저씨한테 물어보니
네모난 지우개같이 생긴 키를 키 박스에 넣으면 시동이 걸린다는..
'아휴.. 저런 애들한테 아우디 새 차를 줘야 한다니..' 콧수염 아저씨의 탄식이 뒤통수에 들리는 듯 하다
한시간 동안 땀 흘리며 걸어온 그 길을 차를 타고 순식간에 숙소로 복귀.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자동차 매니아인 한솔형님의 흥분된 첫 대사를 예상해 보았다.
아마도 분명히 '우와 대박!'을 외칠 것이라 전망했는데..
10분 뒤,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여 시동을 끄기도 전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콰트로에 거기다 S라인이라는 탄성! (물론 나는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지 못한다)
별이나 망원경이나 자동차나..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겠지
오후 2시. 저녁밥 먹을 거리와 하룻밤 노숙할 최소한의 짐을 챙겨서 길을 나섰다.
민정언니가 보내준 홍삼도 챙기고 ♡
아우디 시승 중에도 두 손은 가지런히 김여사 기본자세로. (흰장갑이랑 팔토시도 있어야 하는데..)
세상에서 두 번째로 높은 위도를 달리는 기차의 위용
아비스코를 향해 달리다보니 폭 60km의 Tornetrask 호수가 오른쪽에 펼쳐진다
근데.. 그 거대한 호수가 모두 얼어서 곱고 흰 눈이 덮여 있다
야 이건 진짜 말도 안 된다. 이런 황홀한 풍경이 눈 앞에....
그림자마저 예술이다
한시간여를 달려서 아비스코 국립공원에 도착.
키루나에서 산 쏘렐.. 티나?
쏘렐 받고.. 해외직구로 지른 제트스키.. 티나?
며칠간 1일 2식을 실행했었는데.. 오늘은 너무 배가 고프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엔 아침 먹고 바로 자서 오후에 일어났으니 두 끼로 충분했던거지,
한시간 걸어서 차 찾으러 가느라 오늘 아침밥은 이미 소화 끝났었음
조그만 뷔페식당에서 13000원짜리 초간단 뷔페로 끼니 해결. (이 동네에선 초저가 수준이다)
(우리가 점심을 해결한 오로라 식당 입구, 내부에는 오로라 사진들도 걸려 있다)
밥을 먹고 나오니 동쪽의 설산이 금색으로 옷을 갈아 입는 중.
이 석양도 한참 한참 가겠지.
스키 리프트를 타고 산 정상에서 아비스코 국립공원 설경 한 번 내려다보고 오려고 했는데
우리가 너무 늦게 가는 바람에 이미 주간 운행 종료. (야간은 오로라 관측용으로만 비싼 값에 판다)
'왕의 산책로'라는 이름의 트래킹 코스로 향했다 (왕이 왔었다는 건지 산책로의 왕이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래 표지판 맨 위의 Kungsleden이 그것이다.
어딜 가나 오로라 광고판
산책로에 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다
(다들 동네 뒷산에도 안 올라갈 사람들이지만..)
발자국 대신 스키 자국만 가득한 산책로 옆의 나무들은
나무 뿌리는 구경을 할 수 없고 가는 잔가지가 눈밭 위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마도 뿌리는 눈더미 아래.. 1M쯤 밑에 있을 것 같다
원래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 반정도 걸리는 길인데, 하얀색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설산인 상태인 데다가
(원래는 이런 곳이라 함)
우리는 낮에 힘을 빼면 안 되는 사람들이기에.. 적당히 가다가 돌아오기로 했다
아마 왕도 겨울에는 산책하러 여기까지 오지 않을 듯.
한 20분쯤 걸어 들어갔다가 U턴 하여 돌아오는데, 셀카 한 장 찍으려고 폰을 꺼내려니
내 폰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지? 분명히 아까 산책로 입구에서 꺼내서 사진 찍었었는데..
어디 갔지??? 관측기에 쓸 중요한 사진들, 그리고 내 달그림 연작의 원본이 모두 들어있는데....
그리고 오늘밤 관측 포인트와 세부 지도도 모두 그 폰에 저장되어 있었다
망했다.. 혹시나 하여 눈 덮인 길가를 계속 두리번거리며 돌아오는데
저기 앞에.. 무언가 흰 벽돌같이 생긴 아이가 하나 다소곳이 누워있다
(내 폰은 노트4로 S전자에서 만드는 폰 중에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아.. 이런 감격의 재회가 있나..
내가 받은 생일 선물 중에 최고의 깜짝 선물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그 날, 3월 16일은 내 생일이었다)
아직도 석양은 현재진행형.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차를 타고 관측 포인트로 향한다
15분여 더 이동하여 관측지 도착.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니, 주차장 앞쪽으로 발자국이 나 있다.
저 앞은 호수일텐데.. 설마?
주차장 경계석을 넘어서, 종아리까지 빠지는 눈밭을 걸어 내려가니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우리는.. 우리는 그 얼음 호수를 두 발로 밟고 서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눈 덮인 호수. (길이가 60km이니 안 보일만도 하지)
아비스코에서 오로라 다음으로 자랑하던 U자형 빙하 침식 지형도 완벽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엔..
너무나도 완벽한 비너스벨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비너스벨트를 십여차례 봤을텐데
이렇게 완벽한 비너스벨트를 본 적이 있었을까? 지평선이 보이는 곳에서 본 적은 없으니 더 낯설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개선장군보다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만인에게 염장을 지르는 Nightwid)
그리고.. 해가 천천히 지는 북극의 비너스벨트는 쉬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지겨워서 더 이상 안 봐도 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저기요.. 니가 퇴근해야 별들이 출근하거든요?
비너스벨트 반대편, 느려 터진 일몰
호수 중앙까지 걸어가서 사진 찍던 동훈 형님이 돌아와서 하는 얘기..
저 가운데에 혼자 서 있으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특별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내 등을 떠민다
한참을 뽀드득 거리는 눈 소리를 들으며 걸어간 그 곳.
나는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 진공 상태를 기대했으나
귀에서 웅~~ 하는 노이즈가 들린다
눈 덮힌 호수 바닥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들과 제트스키 자국을 빼면..
내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은 도저히 지구상의 것이라 믿기지 않는다
하얀 산과 하얀 평원, 그리고 한없이 투명한 하늘과 비너스벨트..
고생대 어느 시기라고 해도 믿을만한,
인터스텔라에서 보던 얼음 행성을 떠올리게 하는
태초의 얼음 호수.
내가 그 곳에 서 있다.
완벽한 밤하늘과 오로라가 곧 펼쳐지길 기다리면서..
(아래 링크는 폰의 파노라마 기능으로 찍은 얼음호수 풍경이다. 왜그런지 사진이 안 올라가서 링크로만..)
폰으로 확인한 오로라 예보는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다
8시가 넘었는데 아직 박명은 진행 중이다. 북극이라 오리온도 허리 위만 겨우 보인다
박명을 기다리며 동훈형님이 한국에서 공수해 온 차량용 전기포트로 커피를 준비하는데..
차에 꽂으면 되니 편리하긴 한데 시간은 오래 걸린다. 시동 걸고 한 20분은 끓여야 하는 듯.
물을 끓이고 끓이고 또 끓이는 사이 (텀블러 하나 분량이다)
드디어 박명을 맞았다
지난 3일간 키루나에서 벗고개-홍천 사이 정도의 하늘을 보았는데
여기는 인제나 호주 급이다
아비스코 관광지 광해도 벗어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데
호주급 하늘이 못 될 이유도 없지.
동훈 형님이 분주히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는 사이에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오늘따라 유성은 별로 없고 대신 위성들이 많다.
수많은 위성들을 쳐다보던 몇달 전 서호주에서의 첫날 밤이 생각났다
해외 파견을 갔으면 이 엄청난 장소에 오지 못했겠지..
생각해보니 내가 가야했을 그 해외파견 T/O를
어부지리로 차지한 애가 오늘쯤 출국을 한다고 했었다
하늘에는 북쪽하늘 멀리서부터 오로라가 점점 진해지고 있다
[ 김동훈 作, 얼음 호수의 오로라 ]
이 환상적인 장소에서 대박 오로라까지 볼 수 있을까?
'오로라도 회사일도, 인생은 모르는거야'
애써.. 애써 위안해 본다
한솔형님과 나란히 의자를 놓고 앉아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틀었다
서호주를 헤매며 들었던 정명훈 Very Best CD를 mp3로 만들어서 폰에다 담아왔다
정명훈의 경건함은 호주의 황량함보다 북극권의 겨울 풍경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반대편, 남쪽에서도 오로라가 조용히 등장했다
[ 김동훈 作, 은하수보다 더 은하수같이 ]
북쪽과 남쪽 멀리서 생겨난 오로라는 서서히 세를 키우면서
조금씩 일어서더니 결국은...
거대한 얼음호수 위, 투명한 하늘에서 만나서 거대한 아치를 완성했다
[ 김동훈 作, 오로라 브릿지 ]
장엄하다.
이 한 마디 외에는 이 날의 오로라를 설명할 수가 없다
하늘에는 두 개의 은하수가 생겼다 (하나는 진짜 은하수, 그리고 그 위에 오로라)
색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육안으로는 회색만 보였다)
열차를 만들거나 바람에 날리는 커튼이 되지도 않았다
(김동훈 作, 오로라 연속 촬영)
(작은 이동체는 유성이 아니고 인공위성들이다. 상대적인 오로라의 변화 속도를 유추할 수 있다)
그저 천정을 정확히 횡단하는 거대한 다리를 하나 만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오로라 아치는 그 곳의 장엄한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빙산도 얼음 호수도 끝없는 눈밭도 거대하고 조용한 오로라도.. 마치 태초부터 이 모습 그대로 전해져 왔을 것만 같다
항상 분위기를 잘 맞추는 내 블루투스 스피커..
어느새 바흐의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 흘러 나온다
없는 신심이 막 샘솟을 것만 같다
밤 11시 반, 아우디 트렁크에 좌판을 벌리고 전투식량으로 늦은 저녁을 먹는다
오로라가 빵빵 터지지 않아도 하나도 급하지 않다
여기서는 이 과묵하고 진중한 오로라가 더 어울리는 조합일런지도 모른다
[ 김동훈 作, 오로라 & 은하수 크로스! ]
전투식량을 모두 비우고, 차에 들어가서 맘편히 잠을 청했다..
.....
얼마나 흘렀을까? 불편한 잠자리에 허리가 아파서 잠에서 깼다.
시간은 새벽 2시 50분. 한솔형님은 운전석에서 여전히 취침 중..
밖에서는 동훈형님이 여전히 쉬지 않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렇게 셔터 누르고 싶어서 그 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거대한 아치를 만들던 오로라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저녁 시간에 두 개의 은하수(오로라 다리와 그 안의 진짜 은하수)를 목격한 것만 해도 어디인가.
오로라에게 겸손을 배운다
또다시 느린 박명이 서서히 찾아오고 있다
전투식량 먹을 때를 빼고는 한 시도 쉬지 않는 김동훈님을 뒤로 하고
접이식 의자와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 다시 호수 중앙으로 한참을 걸어간다
아까 귀를 어지럽히던 노이즈도 사라지고,
내 숨소리와 몸을 움직이며 나는 눈 밟는 소리만 조금씩 들릴 뿐..
내가 있는 세상에는 진공과도 같은 적막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만이 존재한다
(날이 영하 5도 전후로 따뜻해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여기서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뭐가 뭔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암적응 된 눈으로 그 별빛들을 마냥 받아들인다
아무 생각 없이 개방된 동공으로 별빛을 축적하다가 새벽 5시, 피요르드 관측(?)을 위해 국경 너머 노르웨이를 향해 출발했다
Nightwid 無雲
1. Prologue : 모든 것의 발단
2. 원정 준비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원정
3. 1일차(서울-키루나) : 라플란드로 가자
4. 2일차(키루나) : 오로라와의 조우
5. 3~4일차(키루나-아비스코) : 태초의 얼음 호수
6. 5일차(나르빅-키루나) : 폭풍의 하늘
7. 6일차(오슬로-스발바르) : 뭉크를 찾아서, 북극을 향해서
8. 7일차(스발바르) :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9. 8일차(스발바르-오슬로) :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시공간
10. 9~10일차(프랑크푸르트-한국) : 10일간 비행기 10번 타기
11. Epilogue : 진인사대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