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북극권 원정 - #4. 2일차(키루나) : 오로라와의 조우
2015. 4. 26 (日) 조강욱
1. Prologue : 모든 것의 발단
2. 원정 준비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원정
3. 1일차(서울-키루나) : 라플란드로 가자
4. 2일차(키루나) : 오로라와의 조우
5. 3일차(키루나) : 쉬는 것도 하늘 뜻대로
6. 4일차(키루나-아비스코) : 태초의 얼음 호수
7. 5일차(나르빅-키루나) : 폭풍의 하늘
8. 6일차(오슬로-스발바르) : 뭉크를 찾아서, 북극을 향해서
9. 7일차(스발바르) :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10. 8일차(스발바르-오슬로) :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시공간
11. 9~10일차(프랑크푸르트-한국) : 10일간 비행기 10번 타기
12. Epilogue : 진인사대천명
============================== 2일차 ==============================
한참 자다 말고 8시 반에 일어났다
캠프리판의 조식뷔페 시간은 9시반까지.
숙박비에 포함된 조식을 포기할 이유는 없지.
북유럽의 아침식사
음식 앞에서는 항상 경건한 김동훈님
1일 2식의 첫 식사.. 배가 찢어지게 먹었다
식당 건물 2층에는 통창이 있는 휴식 공간이 있다
오로라 보기에는 부족할 거 같지만..
1층 로비에는 깔끔하고 안락한 쇼파가 있다
리셉션에 오로라 포인트를 다시 물어보니 숙소 근처의 ‘우드 펜스’가 있는 공터를 소개해 준다
집에 가기 전에 둘러보자..
관광객을 위한 오로라 대기실(?)로 쓰는 건물 (우리는 관광객이 아니니.. 들어가 볼 일은 없었다)
대기실을 지나니 누가 봐도 ‘우드 펜스’임을 알 수 있는 공터에 도착했다
근처 민가도 아직 가까운 위치고.. 괜찮을까?
우리 집 앞. 10시인데 태양 고도가 이것 밖에..
잘 먹고 나서 다시 나머지 잠을..
정오가 넘어서 일어나보니 한솔형님이 망원경을 조립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로라와 Deep-sky 관측 두 마리 토끼를..
먹을것 장을 보기 위해 시내로 출발.
식당과 리셉션이 있는 숙소 메인 건물
도로에는 작은 검은색 돌멩이 같은 것이 무수히 깔려 있다. 미끄럼 방지 용도일 듯.
북극권 동네의 흔한 풍경
눈이 많이 오는 동네라 그런지 지붕이 다들 뾰족하다
횡단보도 앞에 서면, 신호가 없더라도 잘 달리던 차들이 보행자를 위해 멀리서부터 멈춘다
원래 이게 당연한 건가.. 한국에서 못 받던 대접이라 어색하기만 하다
나온 김에 키루나 시내 구경도 해 보자
키루나에는 스웨덴에서 가장 멋진 교회가 있다 하여 가 봤는데..
나무로 만든 생선 비늘같이 생긴 것이 내 취향은 아닌 것 같다
성당 내부도 목조 건물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기골이 장대한 신부가 (카톨릭 신부님 아님)
웨딩드레스를 차려입고 입장 대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하객은 아직 안 왔는데..
밖에서 오후 3시 종 치는 것을 듣다가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오니 이미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는데,
앉아있는 하객은 한 명도 없었다 (오른쪽 옆에 앉아 있는 두 명이 다임)
축의금도 양가 부모님도 없다
결혼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이렇게나 다른 것인지..?
세 명 패딩 값만 더해도...
나는 교회보다 학교 건물이 더 멋있었음
교회도 쇼핑센터도 설원의 관측지도... 구글 지도만 있으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
스웨덴의 나름 대형 마트인 ICA에 들러서 식료품을 구입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요리에는 아무도 소질이 없다는 것을.
태워 먹지만 않으면 되는 구이용 소고기와
소스만 뿌리면 되는 샐러드 같은
도저히 실패할 이유가 없는 것들만 잔뜩 샀다
마트에 의자 종류는 팔지 않아서
근처의 스포츠용품 판매점에 들렀다
한참을 헤메다가 우리의 니즈에 딱 맞는 작은 접이식 의자를 발견!
양 손에 짐을 가득 들고서 집으로
이 와중에도 동훈 형님은 여전히 1번 포즈
동네의 스키장. 어제 우리가 관측한 곳은 저 스키장 산 아래 어디쯤이다. (다행히 이 날 야간 스키는 없었다)
북극의 흔한 교통수단인 제트스키. 하.. 타고 싶어라
집에 와서 작은 냉장고를 가득 채우니 무언가 든든한 기분이 든다
이건 한국에서 공수해 온 라면과 햇반, 그리고 전투식량
오늘의 가장 비싼 재료로 저녁 준비중인 김동훈님
싱싱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채소
스웨덴식 과자와 치즈 (꽤 맛있다)
한참 저녁을 준비하고 식탁에 세팅을 하고 있으려니 창문 밖의 풍경이 예술이다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구름은 점점 사라지고 하늘색은 서서히 어두워진다
근데 박명이 길어야 30분일텐데 북극권에서는 태양의 입사각이 작아서 그런 것인지
해가 뜨고 지기 직전의 그라데이션이 마냥 하늘에 떠 있다
항상 순식간에 지나가던 애들인데..
노을도 세월아 네월아 천하 태평이다
저녁을 먹고 정리하고 나가려고 하니 왜 이리 졸린지.
밤샘을 위한 체력 보충의 명목으로 먹자마자 다시 취침!
밤 9시에 일어나서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숙소 리셉션에서 추천한 곳, 아까 아침에 답사하고 온 ‘우드 펜스’ 공터로..
춥게 입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서 오로라를 지켜보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근데..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보니 멀리 아파트 불빛과 숙소 주위 가로등 불빛에 하늘이 훤하다
고작 여기서 오로라 관측 유료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우리한테 겨우 '일반인용' 관측지를 소개한거니.. 귀엽네~~☆
사실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별에) 미친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겠지.
하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도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색도 명확히 보이고 움직임도 활발하다
10시쯤, 다시 짐을 싸서 어제 설원 속에서 헤메다 찾은 그 곳으로 향했다
칠흙같이 어두운 숲 속에서 10여분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오로라는 계속 펄럭인다
어찌 말로 설명한 길이 없어서 그림으로 구분동작 상상화를 만들어 보았다
일단 아무것도 없는 검은 하늘에 빛줄기들이 생기면 (만화영화의 숲 속의 요정이 등장하는 것 같다)
그 줄기들이 넓어져서 열차를 이루고
그 열차가 한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방향을 바꿔서 급 유턴을 하고서
한참을 지 맘대로 놀다가 사라져버린다
위에 그린 그림들을 연결해서 동영상을 만들어 보았다 (배경 음악의 의미는 다다음 편쯤 설명)
(아래 동영상이 잘 보이지 않으면, 팝업창에 뜬 Window Media Player 실행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하아.. 이것이 오로라구나
말로만 듣던, 사진이나 타임랩스로만 침흘리며 보던 그 오로라를
눈밭에 서서 맨눈으로 보고 있다
[ 김동훈 연속촬영, 저녁 10시 50분경 ]
1. AniGif_150314_225547 (24MB 짜리 파일은 첨부가 안 되네요..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그래 우리가 이거 보러 여기까지 온 거 맞지..
관측지(어제 그 눈밭)에 도착해서 한솔형님이 5인치 굴절 망경을 설치했는데..
오로라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아이피스는 볼 생각도 나지 않는다
또 전 하늘을 돌아다니는 오로라가 광해와 같은 역할을 해서
하늘 상태에 비해 망원경으로 보이는 상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결정적으로 매일 밤 오로라가 떠서
오로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야 할 일이 전혀 없었다 (이건 염장)
대신 우리는 망원경의 새로운 용도를 찾았다
별하늘 기념사진에는 역시 망경.. 그 중에서도 하얀 굴절이 최고지!
하늘에서는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오로라 씨앗(?)이 나타나고, 퍼져서 넓은 띠를 이루고,
너울거리며 이동하는 열차를 만들고, 커튼처럼 펄럭이며 하늘 뒤편으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한솔형님과 둘이서 아까 사 온 의자에 입 벌리고 앉아서
낮은 탄성과 함께 그 광경을 그저 지켜본다
그 와중에도 오로라 촬영 장비를 세 세트나 가져오신 동훈형님은 쉴 새 없이 구도를 잡고 셔터를 누른다
나는 20년이 넘게 망원경으로 안시 관측을 했지만
작년부터 왜 그런지 맨눈으로 보는 것이 더 좋아지고 있다..
그건 오로라 밑에서도 마찬가지.
오로라를 담을 정도의 수준이 되는 카메라도 삼각대도 한국에서 챙겨 왔지만
관측지에는 들고 오지도 않았다 (삼각대는 망원경 용으로 사용 중)
내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느라고 시간을 쓰는 것 보다는
내가 잘 하는 것에 집중해야지.
아래는 이 날 동훈 형님의 오로라 사진들
[ 김동훈, 오로라 커튼 ]
[ 김동훈, 열차의 종착역 ]
[ 김동훈, 돌아! 도라! 도라! ]
(위 제목들은 작가의 의도와 관계 없이 제가 그냥 만든 거에요)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진하기는 하지만 녹색만을 보여주던 오로라는
보기 어렵다는 붉은 색 기운이 살짝 살짝 비치면서
하늘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오로라 씨앗이 자란다
어? 어? 하는 사이에
이곳 저곳에서 나타난 오로라들이 머리 위에서 모두 연결되면서
순간적으로 오로라 스톰이 나타났다
뭐랄까.. 핑크색의 거대한 지네가 천정을 꿈틀꿈틀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녹색의 오로라 바탕 위에 흰색, 붉은색이 섞인 밝은 핑크색의 오로라가
정말로 폭풍이 치듯 순식간에 하늘을 횡단했다
으악!!!!!!
뭔가 고급진 감탄사를 뱉어야 하는데
그저 생목의 비명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우리만 보고 있던 것은 아닌 듯, 온통 눈으로 뎦인 고요한 숲 여기 저기에서
사람의 원초적인 비명 소리가 한꺼번에 같이 들린다
이런 것을 서브스톰이라 하는 것일까?
언제 봤어야 알지..
아.... 이건 정말이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 그 느낌만 대충 표현해본 오로라 스톰 그림 ]
대략 10초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다시 하늘은 조용해졌다
[ 김동훈 연속 촬영, 스톰의 퇴근 (위에 설명한 스톰의 절정이 지난 후) ]
아까의 감동을 되새기며.. 위에 올린 오로라 인증샷도 찍고..
근데 단 몇 초간 정신없이 본 스톰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람의 눈도 적정 노출시간이 있는지
오로라 스톰도 계속 시신경에 뇌세포에 빛줄기를 축적해야 하나보다
하도 소리를 지르고 오로라 어디 나타나는지 사주경계를 하느라 조금 피곤하고 허기져서
인증샷으로 암적응을 날리고 잠시 숙소로 철수했다가
새벽 3시가 넘어서 마지막 피치를 올리기 위해 동훈형님과 장비를 짊어지고 다시 길을 나섰다
표정관리 필요한 사람들
북극의 밤은 짧다. 새벽 4시가 되기도 전에 동쪽 하늘은 이미 밝아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북극의 밤하늘에선 이 여명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임을..
스마트폰의 터치펜을 꺼내들고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폰으로 김광석의 노래들을 랜덤 재생으로 걸어놓고
김동훈님의 막바지 촬영을 느긋이 지켜보며
맥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보고 노래 한 소절 따라 부른다
깊고 맑고 파란 무언가를 찾아 떠돌이 품팔이 마냥
친구 하나 찾아와 주지 않는 이곳에 별을 보며 울먹이네
- 김광석, ‘불행아’ 중에서 -
그리고는 폰의 그림 어플로 새벽 여명의 하늘을 시간별로 표현해 본다.
[ 새벽의 여신 & 새벽, 갤럭시노트4에 터치펜, 스웨덴에서 조강욱 (2015) ]
새벽 5시, 하늘이 밝았다
박명 전에 보려고 기대했던 월령 24일 달은 결국 보지 못했다
(전 월령 그림 그리기 프로젝트에서 몇 개 남지 않은 달 중 하나였다)
새벽 여명 빛으로 셀카도 한 장 찍고
동훈형님과 둘이 장비를 철수하고 설산을 걸어 오르는 중에,
남쪽 지평선 근처에서 말도 안 되는 비주얼의 하현달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현달의 출몰을 유심히 본 사람은 모두 이 모양이 낯설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렇게 반듯하게 서 있는 하현 반달은 중위도 지역에서는 중천에 떠 있을 때만 가능한 것.
월출 때도, 월몰 때도 하현달은 반쯤 누워서 떠서 엎어져서 지게 되어 있는데
지평선 바로 위, 고도 3도에 반듯한 하현달..
지금 생각해 보니 이곳, 북극권 키루나에선 저 모습이 바로 남중한 상태인 것이다
이건 기적이야.. (사실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예측 부족이었지 불가사의한 천문 현상은 아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뿌듯한 마음으로 철수하다 말고,
다시 황급히 동쪽도 아닌 남쪽 시야 트인 곳을 찾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밭을 헤멘다
적당한 곳을 찾자마자 아무말 없이 서로의 장비를 펼치고 각자의 마지막 불꽃을..
[ 김동훈, 북극의 하현달 ]
(동훈형님이 찍은, 북극의 하현달을 보면서 그리고 있는 Nightwid)
어느새 시간은 다시 30여분이 훌쩍 흐르고, 달은 뜨자마자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아래 그림은 며칠 뒤 비행기 안에서 나뭇가지 노가다를 마치고서야 완성되었다
[ 북극의 하현달, 갤럭시노트4에 터치펜, 스웨덴에서 조강욱 (2015) ]
내가 그리는 달그림에서 실제로 달을 그리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그림 한 장 완성하는 시간의 1/1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9/10이 받쳐 주어야 달이 빛이 나는 것을 어떡해.
이제 진짜로 관측을 접어야 할 시간..
긴 하루를 마치고.. ‘진짜’ 오로라를 두 눈 가득, 마음속 깊이 눌러 담고서 새벽 6시에 취침.
Nightwid 無雲
1. Prologue : 모든 것의 발단
2. 원정 준비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원정
3. 1일차(서울-키루나) : 라플란드로 가자
4. 2일차(키루나) : 오로라와의 조우
5. 3일차(키루나) : 쉬는 것도 하늘 뜻대로
6. 4일차(키루나-아비스코) : 태초의 얼음 호수
7. 5일차(나르빅-키루나) : 폭풍의 하늘
8. 6일차(오슬로-스발바르) : 뭉크를 찾아서, 북극을 향해서
9. 7일차(스발바르) :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10. 8일차(스발바르-오슬로) :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시공간
11. 9~10일차(프랑크푸르트-한국) : 10일간 비행기 10번 타기
12. Epilogue : 진인사대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