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1 서호주 무계획 관측여행
#1. 바람 좀 쐬고 올께요. 서호주에서
#2. 별이불이 제일 따뜻해
#3. 피너클스와 인도양, 쪽박과 대박 사이
#4. 자연의 창으로 우주를 바라보다
#5. 별 찾는 수도승
2015년 1월 11일, Nightwid 조강욱
☆☆☆☆☆☆☆☆☆☆☆☆☆ Day 4 (25 Nov. 2014) ☆☆☆☆☆☆☆☆☆☆☆☆☆
파리 승객들을 가득 태우고 여명이 비치는 비포장 길을 달린다
(창문에 붙어 있는 검은 점들이 1등석 승객들. 자연의 창 입장권도 아직 그대로 붙어 있다)
얼마 가지 못해 차를 세웠다. 도로 점거하고 시위하는 분들이 있어서..
기다리면 비키겠지 하고 서 있는데 새벽 명상을 하고 계신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빵빵 한 번 해 주니 그제서야 슬금슬금 뛰어간다
다시 물결 무늬를 지나
문명세계 까지는 30km
반쪽은 노란색인 포장도로를 만드는 데에 나도 일조하고
매표소를 다시 만났다
지난 밤의 일들이 꿈만 같다
문명세계에 들어와서 길가 주유소에 잠시 들러 기름을 채운다
퍼스에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기름값은 점점 비싸진다
주유기가 나에게 '지나가고 싶으면 맘대로 해~ 너 주유소 언제 또 만날지 나도 몰라'
하고 배짱 멘트를 날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이동해야 할 거리는 600km가 넘는다
나는 운전 하는 것을 즐기지 않아서 별 보러 갈 때를 제외하면 거의 운전대를 잡지 않는데
(집에서의 운전은 대부분 우리 원장님 담당)
호주에 와서 며칠동안 1,500km를 이동했다
목적지는 대부분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다
내 반년치 운전을 한 번에.. 아마 앞으로도 깨기 어려운 기록일 듯.
며칠동안 핸들만 잡고 다녔는데
호주 전도에서 보니 그 거리는 너무나 미미하다.
나머지 땅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급해도 볼 것은 보고 가야지.
자연의 창 (Nature's Window) 친구,
칼바리 초입에 있는 자연의 다리 (Nature's Bridge) 함 보고 가자
퍼스까지 갈 길이 멀어서.. Nature's Bridge까지 나 있는 인도양 해변의 산책로를 뛰어 내려간다
여기서 일몰을 보면 엄청난 오메가가 나올 듯.
헉헉대며 Nature's Bridge 전망대에 도착했는데.. 다리는 어디 있는거야?
앞에는 망망대해 뿐인데..
옆에 특이한 단층의 바위들이 보이길래 시선을 옮겨 보니..
이거구나.. 안 보고 갔으면 어쩔뻔 했니
초췌한 몰골로 셀카도 한 장 찍어 본다
무엇이 저 다리를 만들었을까 잠시 궁금했는데
해변을 쉴새 없이 때리는 거대한 파도들을 보고 있으니
이 예술품을 만든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명확해 보인다
다시 황급히 주차장으로 돌아 가는데..
기가 막히는 비경들이 내 다리를 붙잡는다
우리 원장님하고 다시 와서 또 봐줄께. 쫌 기다리고 있어봐
지난 토요일부터 일, 월, 화요일이 되도록 하루 몇 개 시리얼바로 연명하고 있다
우유는 상해서 (가공 우유가 왜 상하지?), 빵은 맛이 없어서 버린지 오래
아 배고파. 시리얼바를 두 개나 꺼내 먹어도
먹을 것에 대한 욕구는 조금도 차지 않는다
'너 호주에 먹으러 왔어?' '아니 그래도 사람이 먹어야 살지'
내 속에서 두 마음이 충돌하다가
퍼스 공항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맛있는 뷔페를 생각하며..
밥은 거기서 해결하기로 한다
나는 여기에 별이 보고 싶어 온 사람이니까..
2년간의 탄자니아 파견 대신 온 4일간의 서호주 여행인데
좋은 호텔, 별 몇 개 달린 레스토랑이 무슨 소용일까
별 볼 때 만큼은 별 보는 일에만 집중하겠다는 다짐....
2년 전에 호주 북쪽 케언즈에서 스노클링 일정에 정신이 팔려서
어이없이 개기일식을 망치고 나서
스스로에게 세뇌시킨 맹목적인 평생의 신념이다.
평소에는 술 먹고 놀러 다니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별 보는 것 만큼은 수도승처럼 하고 싶다
장비에도 조건에도 관계에도 구속받지 않고
별 보는 생각과 행동으로 삶을 채우는,
평생을 별을 보며 갈망하고 깊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수도승의 금욕적인 삶과 같은 그런 거 말이야.
현실 세계에서는 양보하고 타협하고 때로는 쾌락을 좇으며 살겠지만
별 보는 일 만큼은 평생동안 본질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허기를 달래며 다시 칼바리를 출발.
오늘의 이동 거리는 600km.
시간 절약을 위해 웬만하면 최소 100km 이상 이동하고 쉬기로 한다
두 번째 졸음 쉼터의 조형물. 의미가 뭐지?
조형물 근처의 쓰레기통 옆에다 접이식 의자와 싸구려 텐트를 고이 포장하여 놓아 두었다
누군가가 잘 썼으면 좋겠다
칼바리에서 탑승한 파리 승객 50분을
진짜 퍼스까지 모시고 가야 하나 걱정이 되었는데.. 작은 생활의 발견 하나.
차 안에서 윙윙거리는 애들이 운전석 옆 유리창 근처에 오면 유리창을 살짝 내린다
그럼 윈도우 버튼 누름과 거의 동시에 한 마리씩 파리 퇴출!
한 100km쯤 지나서는 차내는 파리 없는 청정 지역이 되었다
XP 바탕화면을 하도 오래 보고 있으니 이젠 어디가 어딘지 기억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소실점을 향해 끝없이 펼쳐진 직선의 도로는 마음까지 넓게 만든다
며칠 전, 호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WIKI CAMPS App으로
퍼스 북쪽의 노숙지를 찾아보다 나는 우연히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했었다
'Waddi Farm'
(퍼스에서의 거리 180km. 그리 외진 곳이라 볼 수는 없는 곳이다)
와디팜.. 와디팜.. 그래 거기인가보다
김지현 형님께 오래 전 서호주 관측 갔던 얘기를 들을 때..
어느 point에 갔었냐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와디팜' 이었다
인터넷에서도 관측지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돌아오는 길에 여유 되면 들러 봐야지 했었는데
지금, 고속도로 이정표를 보니.. 여유는 없어도 꼭 가봐야겠다
(도로 이름마저 쿠나 로드이다. 쿠나바라브란은 언젠가 또 가 볼 기회가 있을거야)
김지현 형님은 그 때 박승철님의 조수(?)로 따라 갔었다고 했다
그 분은 나를 알지 못하지만, 생전에 얼굴 한 번 뵙지 못했지만
그 분이 15년 전에 갔던 곳이 어떤 곳인지,
지현 형님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고 왔다는 그 곳이 어디인지 그저 가서 보고 싶었다
WADDI FARMS 정문을 지나고 나서도
비포장길을 10분여를 더 달려서 와디 농장에 도착했다
사무소라고 하는데 인적이 없다
버려진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휑할 수가..
15년 전 이 곳에서 밤새 남반구의 별을 보았을 두 사람을 생각해본다
물론 안시쟁이인 나하고는 그 별들을 영접하는 방식이 많이 달랐겠지만..
그 분이 별들 근처로 가신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별나라 형님들은 그 분의 이야기를 한다
'승철이가..' '승철 선배가...'
오랜 시간이 흘러서 나도 별들 근처로 가게 되더라도
사람들이 '예전에 강욱이가 말이야..' 'Nightwid님이 그러던데' 하고 기억해 줄까
나는 어떻게 우주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와디팜을 나와서 다시 고속도로를 달린다
엉덩이가 쑤시고 피곤도 몰려와서 졸음을 이겨 보고자 음악을 틀었다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하의 골드베르크를 들으니 더 졸립다. 허밍이 안 들려서 그런가
폰으로 블루투스를 연결해서 가요 폴더를 재생하니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나온다
조용필 - 킬리만자로의 표범 (1985)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중략)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중략)
묻지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중략)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중략)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중략)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한참을 몰입해서 조용필의 원곡과 알리의 리메이크 버전을 무한 반복해서
가사에 심취하여 마음 가는 대로 감정 이입하여 부르다보니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킬리만자로는 탄자니아에 있지... 내가 있었어야 할 그 곳 말야
아.. 하하.. 그래 그렇지.. 이런 XX !!!!
방금 전에 수도승의 삶을 살고 싶다 했는데,
칼리만자로에 뜰 별들 생각을 하니 자동으로 욕이 튀어나온다
휴. 본능과 욕망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칼바리에서 넣은 비싼 기름이 다 떨어져 간다
고속도로 옆의 로드하우스에 들어갔다
박자세의 서호주 책을 탐독하며
비상시엔 저 로드하우스 숙소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원하던 대로 순수 노숙으로 3일 밤을 보냈다
그 옆에 있는 로드하우스 주유소
어짜피 퍼스 공항 근처에서 다시 full로 주유하여 반납해야 하니 적당히 넣자
$24.02 어치 기름을 넣고 카운터에 기름값 결제하러 갔더니
서부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가 나온다
로드하우스에서는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알고 있었으나
아저씨 인상에 쫄아서 물어 보지도 못하고 카드만 내밀었다는.
근데 이 아저씨, 아멕스 카드는 안 받는다고 한다 (비자와 마스터 카드만 가능)
칼바리 국립공원 매표소랑 똑같네..
어제 호주 애기 아빠한테 받은 동전을 주섬주섬 꺼내서 겨우 잔돈을 맞췄는데
인상파 아저씨가 깨알같이 2센트 더 내라고 안광 레이저를 발산한다
쫄아서 어.. 저기... 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
'너 다음 호주 올 때 가져 와라' 하며 쿨하게 돌아서서 사무실로 들어가신다
차가운 시골 남자.. 하지만 알고 보면 쿨한 남자.
퍼스 인근에 오니 나무들이 쑥쑥 자란다
퍼스 인근 어느 졸음 쉼터의 탁자에 남은 물과 맥주들을 고이 올려 놓았다
낮 기온이 34도인데 맥주 괜찮겠지?
퍼스 인근, 사람의 향기.. 정체도 정겹다
호주에서 본 Deep-Sky 중 Best 3를 꼽아 보면 뭐가 있을까?
3위 - 에타 카리나 성운 (η Carina Nebula)
(출처 : http://www.cyanogen.com/gallery/ETAsmall.jpg)
나는 발광성운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성운 말고 Giant Eruption Star인 η Carina 별 자체와
그를 감싸고 있는 Key hole 암흑성운은 너무나 좋아하지만
[ η Carina와 Key hole, 검은 종이에 파스텔 - 조강욱 (2010) ]
성운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망원경으로만 봤으니깐.
10배율 쌍안경으로 보는 에타 카리나는 망원경으로 보는 오리온처럼
장대하고 화려하다
저배율과 고배율은 나름의 쓰임이 있는 것이다
그 대상에 맞는 배율을 찾고, 그 배율로 보는 맛을 알아야
내가 원하는 더 깊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지..
2위 - NGC 3532 (Wishing Well)
이제는 3532를 한 번 제대로 표현해 봐야겠다
음.. 근데... 망원경이 없어소~~
(출처 : 개그콘서트 명인본색)
하고 핑계를 대기에는 쌍안경으로도 충분히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다음 원정에서는 꼭 3532를 관측한 느낌을 글로 정확하게 표현해 봐야지
1위 - LMC (Large Magellanic Cloud)
3532 & 에타카리나 콤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지구에서 바라보는 우주에서 남천과 북천을 통틀어서 LMC보다 멋진 아이는 없겠지.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4/Large.mc.arp.750pix.jpg)
망원경으로 보는 엄청난 디테일은 없었지만
매일 밤 아무 장비도 없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던 아름다운 자태는
망원경이 없는 아쉬움을 크게 느끼지 못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쌍안경으로 볼 때마다 멧돼지에서 용으로, 천사로 3단 변신을 하는 깨알 재미까지.
언젠가.. (당장은 못 하게 되었지만..) 언젠가 남반구에서 오랫동안 별을 볼 기회가 생긴다면
몇 달 동안 LMC만을 관측하고 전지 만한 종이에다 관측 스케치를 남길 것이다
언젠가, 언젠가는 꼭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별자리도 Best 3를 뽑아 볼까?
3위 - 두루미 (Grus)
남천의 백조자리라 부를만한 두루미.
내가 유일하게 익숙하게 찾을 수 있는 남쪽 별자리인 Grus에게 3위를 준다
망원경이 없어서 환상적인 Grus Trio를 보지 못한 것은 살짝 아쉽지만..
2위 - 에리다누스강 (Eridanus)
3532가 LMC를 이길 수 없듯이,
Grus가 아무리 멋져도 Eridanus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1위 - 물병자리
한국에서도 전신이 다 보이는 물병자리가 왜 1등일까?
94년 고등학교 2학년때 여름철 대삼각형을 찾아본 것을 시작으로
96년 즈음에 북반구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 50여개는 모두 보았지만
가을 하늘의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물병자리는
북쪽 하늘에서 가장 작은 조랑말자리 만큼도 관심을 준 적이 없다
Deep Sky도 별로 없어서 M2 구상성단을 찾을 때 말고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호주에서 천정에 남중한 물병자리를 보며 발견한 별무리는
사이먼 래틀 아저씨의 경쾌한 손놀림 같기도 하고
기원전 수메르 시절 물병자리를 이루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굽이치던 강줄기 같기도 하다
(출처 : 유태엽님 글 http://www.seoulkaas.org/xe/index.php?mid=NSFR&page=1&document_srl=248031)
가을 하늘을 20년간 봐도 못 느끼던 그 별무리를 호주까지 와서 찾게 될 줄이야.
거기 있다고, 안다고 다 본 것은 아닌가 보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더 제대로 보기 위해 5년째 메시에만 다시 보고 있는데..
밤하늘에서 내가 본 것은 무엇이고 더 봐야 할 것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유한한 인생에 얼마나 더 많이 볼 수 있을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Worst 3도 뽑아 볼까?
흠.. 너무나 많다
제단자리? 그물자리? 테이블산자리?
테이블산에는 라카유 대신 내가 갔어야 했는데...
1750년대에 라카유가 만든 볼품없는 별자리들을 떠올리고 있으니
만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바둑판에 의미 없는 돌은, 밤하늘에 의미 없는 별이란 없어.
(출처 : 미생 32수 - 윤태호)
작은 패배... 작은 패배에 불과한 거야. 작은 패배를 견뎌 내자
지금 나에게 닥쳐 있는 시련은 무슨 의미일까?
탄자니아로 장기 파견근무를 못 간 것이
10년 뒤에 보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회상해 볼 날이 있을 거야.
이런 저런 공상에 빠져 있는 사이, 교통 표지판에 비행기 그림이 보인다
배가 너무 고프다. 낮 기온 35도를 오르내리는데 샤워 한 번 못한지도 며칠이 지났다
체력도 바닥나고 몸도 찝찝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집중력도 흐려진다
공항에서 가까운 주유소를 겨우 찾아서 마지막 주유를 하고
작은 공항을 뺑뺑 돌아서 렌트카 반납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짐을 챙긴다
3박 4일동안 흙먼지 날리며 다녔더니 차가 완전 엉망이다
운전석 모직 시트에는 지워지지 않는 썬크림 자국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고
뒷자석과 트렁크에는 요플레 쏟은 자국과 각종 흙과 모래 등..
이거 over charge 내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렌트카 데스크의 누나는 차키만 건네 받고 검사도 안 하고
그냥 쿨하게 가라고 하는거 아닌가
아니 너 차 상태는 궁금하지 않아?
보험료로 차 빌리는 값의 절반을 낸 호갱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행히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하여 문제 없이 출국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17시 30분 비행기 출발, 15시 공항 도착)
09년 상하이에서, 12년 브리즈번에서, 13년 세부에서..
항상 귀국 비행기 때문에 생난리를 겪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평온한 귀국이다
공항 티켓팅 카운터 앞 쓰레기통에 꽂혀 있는 접이식 캠핑 의자 (내 거랑 같은 모델)
내 캠핑 의자는 누군가 잘 가져다 쓰고 있기를..
출국 수속을 모두 마치고 퍼스 공항의 면세 구역에서 원장님 선물이라도 사가려 하는데
이건 뭐.. 퍼스 공항엔 명품은 고사하고 기념품 하나 변변히 살 데가 없다
피너클스에서 사지 못한 벙거지 모자가 있으리라 기대를 버리지 않았으나
현실에 비해 너무 헛된 소망이었다.
렌트카 짐 정리하면서 땀을 많이 흘려서 축축한 몸부터 씻으려고
공항 라운지에 PP(Priority Pass) 카드를 제시하니
여기 공항에선 PP 카드 쓸 수 있는 데가 없다네.
헉 그럼 밥은 어떻게...
참고 있던 배고픔이 다시 강렬하게 내장 기관을 자극한다
가방 안에는 먹다 남은 시리얼바가 아직 20개 가까이 남아 있지만
그걸 더 먹고 싶지는 않다
그럼 공항 매점에서 간단히 요기라도 하면 되잖아?
그건 안 되지.
안 먹고 안 씻고 안 자고 꼬박 4일을 수도승 놀이를 했는데
호주 땅을 떠날 때까진 마지막까지 돈 내고 밥을 사 먹지는 않을 거다
(남은 시리얼바는 안 버리고 모두 싸와서 회사 동료들과 야간비행 언니 오빠들에게 기념품 대신 나눠 주었다)
아직 비행기 출발하려면 한 시간 반이나 남았는데
면세점에 구경할 것도 없고 라운지도 못 가고 뭐하지.
땀에 절은 얼굴을 세수라도 하려고 화장실에 갔더니
화장실 안에 수상한 문이 하나 보인다
이상하게 무언가 있을 것 같아서 그 문을 여니...
놀랍게도 샤워 부스가 나왔다
아니 대체 이게 왜 여기..
샴푸도 비누도 구비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저 뜨거운 물을 맞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온 몸이 녹아 내리는 것 같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Hot shower를 하다 생각해 보니
수건은?
수건은 모두 부치는 짐에 들어가 있는데..
이거라도 써야지 뭐.
기내 반입할 가방 안에 내일 회사 입고 갈 옷이 있어서 그걸로 갈아 입으면 그만인데
이 냄새 진동하는 양말은 어떡하니
(결국 기내에서 받은 수면 양말을 회사에서 하루 종일 신고 다녔다)
서호주의 흙바닥을 뒹굴던 꼬질꼬질한 반바지
덕분에 나는 칼바리에서 이름 모를 벌레들의 공격에 100여 군데를 물리고 한동안 피부과에 다녀야 했다
이 정도면 내일 회사에서 사람같이 보일까?
비행기 탑승 30분 전, 내가 탈 싱가폴 항공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다
허기는 극에 달해서 미칠 것만 같다
시리얼바를 더 먹으면 토할 것 같고...
니가 무슨 고행하는 수도승이냐 자문하지만
별 보는 일 만큼은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해야겠다.
비행기에 탑승하고도 30분 뒤,
이륙을 마치고 식전에 땅콩과 맥주가 나왔다
비행기 돌리는 맛이라는 그 땅콩은 아니지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그 땅콩을 두 봉지 더 먹고 나니 밥이 나왔다
저 검은 버섯의 감칠맛은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역시 반찬은 시장이 최고)
허겁지겁 밥 한톨 남김 없이..
평소에는 살찔까봐 애써 외면하는 버터도 잼도 남김 없이.
커피까지 한 잔 하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서쪽 창 밖으로는 그림같은 석양이 펼쳐진다
지상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색이다.
밥 먹고 정신없이 쓰러져 자다 보니 어느새 싱가폴에 도착,
자정에 싱가폴에서 한국 가는 비행기로 환승했다
옆자리가 비어 있는 행운까지!
셀카를 찍어 보니 얼굴 살이 좀 빠진 것 같아서..
귀국하여 몸무게를 재 보니 4일 사이에 2kg이 빠졌다 (다이어트엔.. 시리얼바 ㅡㅡ)
오늘도 역시 잠을 깨우는 건 승무원 언니.
새벽 5시, 뭘 먹었는지도 모르게 비몽사몽 밥을 먹고 나니
창 밖에는 여명이 밝아온다.
아닌데.. 이 색이 아닌데..
카메라로 화발을 맞추고 ISO를 선택하고 노출값을 결정하는 데 어설픈 나에게
눈으로 본 색을 그대로 표현하는 데는 그림만큼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 타이완 상공의 여명, 갤럭시노트2에 터치펜 - 조강욱 (2014) ]
날이 밝았다
비행기는 구름 이불 위에 있다. 푹신한 쿠션에 바로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서해안의 섬들을 지나
아침 7시 20분. 인천 공항에 착륙했다
인천공항 비행기들 위로 다시 일상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1.
그날 밤, 집에 가니 초딩 1학년 딸래미가 또래들 사이에 유행인 '마법의 해결책'을 보고 있었다
난 어떻게 하면 되죠? 스스로 묻고 책을 펼치니
그래. 그럴까? 그럴지도 몰라. 아니 그렇게 되도록 해야지!
#2.
텐트와 의자는 서호주 어딘가에 놓고 왔지만
침낭은 집까지 가지고 왔다
그 날 이후 나는 이불 대신 그 침낭에 들어가서 자고 있다
일종의 와신상담 같은 것일까?
#3.
12월 그믐 전날, 칼바리에서 본 Day 2 달보다 더 얇은 D-1 달을 보았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호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4일간의 서호주 무계획 관측 여행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비우고
또 그 만큼을 채웠다
4일간 안 먹고 안 자고 안 씻으며
대신 나는 아름다운 대자연과 밤하늘을 얻었다
나는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담대하게 인생의 목적을 추구할 것이다
주위의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이룰 것이다
삶은 그렇지 않겠지만
별은 정말로 수도승처럼 찾아야지.
나는 서호주에서
새로운 조강욱이 되어서
인천공항 입국 게이트를 통과하여
내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왔다.
☆☆☆☆☆☆☆☆☆☆☆☆☆☆☆ END ☆☆☆☆☆☆☆☆☆☆☆☆☆☆☆
#1. 바람 좀 쐬고 올께요. 서호주에서
#2. 별이불이 제일 따뜻해
#3. 피너클스와 인도양, 쪽박과 대박 사이
#4. 자연의 창으로 우주를 바라보다
#5. 별 찾는 수도승
그 동안 긴 글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Nightwid 無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