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1 서호주 무계획 관측여행
#1. 바람 좀 쐬고 올께요. 서호주에서
#2. 별이불이 제일 따뜻해
#3. 피너클스와 인도양, 쪽박과 대박 사이
#4. 자연의 창으로 우주를 바라보다
#5. 별 찾는 수도승
2014년 12월 6일, Nightwid 조강욱
☆☆☆☆☆☆☆☆☆☆☆ Day 1 (22 Nov. 2014) ☆☆☆☆☆☆☆☆☆☆☆
서울에서 예약한 Hertz 렌트카 부스에서
인도계로 보이는 직원의 영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패트롤 패트롤 하길래 경찰을 부른다는 건가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여기서는 가솔린을 그렇게 부른다 한다
결국은 필담으로 렌트 마무리.
혼자 가는 거라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그 자리에서 보험을 들었는데..
그 비용이 차 빌리는 값의 절반을 넘는다
(4일간 차+네비 296달러, 보험 150달러)
그래. 보험은 보험이니까..
차 찾으러 가 보니 캡티바를 예약했는데
토요타 RAV4가 나왔다
계기판, 조작 버튼 등 집에서 타는 차와 거의 비슷해서 안도가 된다
호주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좌회전은 작게 우회전을 크게...'를 계속 주문을 외우며 출발했는데
역시나 몇 초 되지 않아 와이퍼 작동.
호주에서 운전하면 시동 켜고 나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방향표시등 레버가 오른손 앞에 달려있다)
공항 근처 Belmont 쇼핑센터 내의 울워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장을 본다
(퍼스로 교환 교사를 다녀온 이혜경쌤에 의하면 현지인들은 우워스라 한다 함)
나는 숙소를 잡을 것도 아니고 별을 보면서 노숙을 할 계획이니
익혀 먹는 음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산 것들은 초코바와 에너지바, 가공 우유와 빵 조금, 그리고 생수 한 박스.
1년 지나도 썩지 않을 것들만 골라서 카트를 채우고,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마트에서 초저가 텐트를 구입했다는 글이 생각나서
쇼핑센터 내의 K마트에서 텐트+침낭을 약 2만원에 구입 (20만원 아님)
마지막으로 옆의 술가게에서 맥주 10캔을 사서 길을 떠났다
(호주는 맥주 / 와인 등 술만 파는 집이 따로 있음. 결코 싸지는 않다)
쇼핑센터 주차장에서 날씨 검색을 해 보니
기대했던 퍼스 북쪽은 뱅기타고 오면서 본대로 오늘밤 별로 좋지 않다
대신 퍼스 동쪽은 100km 이상 이동하면 밤새 맑음 예보라
이혜경쌤이 퍼스 동쪽 포인트로 추천해준 Wave Rock에 가려 했으나
300km를 넘게 가야 하여 포기.
WIKICAMPS AU에 '캠핑이 가능한 조용한 공터'로 소개된 적당한 곳을 찾아서
네비에 입력하려니 검색이 되지 않는다
전화번호 만으로도 전국 어디나 검색이 되는
결국 경도 위도 좌표로 찍고 출발.
퍼스 도심을 벗어나니 이제 내가 호주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아.. 하하.. 진짜 왔네.. 진짜로..
동쪽으로 한 시간쯤, 오늘의 목적지로 정했던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를 생각하면 오산.
차라리 고속도로 졸음 쉼터와 비슷한데
보통은 고속도로 근처에 작은 공터를 만들고
쓰레기통을 비치해 두는 것 외엔 아무런 시설도 없다
거기에 캠핑을 허가하는 데가 있고, 그냥 차만 댈 수 있는 곳이 있다
출국 전에는, 그냥 무작정 달리다가 맘에 드는데 차 세우고
갓길에 주차하여 거기서 밤을 보내려 했는데
별하늘지기 람이님의 얘기를 들으니
야간에 교통사고 위험이 크기도 하고
경찰한테 걸리면 벌금을 100만원씩 물린다 하여
급하게 노숙이 가능한 공간을 알아본 것이었다
이 날 찾아간 곳은 고속도로에서 30m쯤 숲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이다
아무리 깡촌이라 해도
조금 더 탈출하고 싶은데
해가 지고 있는 지금, 다음 캠핑 사이트는 100km를 더 가야 한다
대륙의 스케일은 중국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
도착해보니 백인 커플이 랜드로버에 텐트로 2층집을 올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인사를 하니 아주 심드렁하고 영혼 없는 인사가 돌아온다
피곤하신 것 같아서 더 말을 걸지는 않았다
주차는 했고.. 차 안에서 아까 사온 우유와 시리얼바로 저녁을 때우고
텐트를 쳤다
군대에서도 쳐본 적 없는 텐트를 서호주에 와서 치게 될 줄이야..
사실 텐트를 치는 것은
'나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혼자 캠핑하러 왔어요' 하고 증명하기 위한 도구.
사실 거기서 한 번도 잠을 자진 않았다
퍼스를 많이 벗어나지 못해서 여긴 아직 수풀이 우거진 지역.
키 큰 나무들 때문에 하늘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는다
퍼스보단 적었지만 구름이 간간히 있었는데..
일몰과 함께 구름도 같이 퇴장.
그리고 얼마 후, 비너스벨트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나타났다
날만 맑으면 이렇게 당연히 보이는걸 한국에서는 왜 그리 보기 힘든지 ;;;
(이유는 호주만큼 저고도의 시야가 확보되지 않기 때문인 듯)
간만에 비너스의 핑크색 벨트를 여유있게 감상해 주시고
차와 텐트에서 좀 멀리, 도로 근처에 텐트 깔판(?)을 깔고 그냥 드러누웠다
(텐트($14)보다 텐트 깔판($15)이 더 비쌌다. 위 사진은 아침에 찍은 것임)
그냥 그렇게 멍하니 누워서 별들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본다
아직 푸른 하늘에 수줍게 하나씩 얼굴을 내밀던 별들은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그 수를 늘려간다
어 구름이 없었는데 저 구름 두 덩이는 뭐지
필시 마젤란이겠지. 그래.. 그것밖엔 없겠지
Grus(두루미) 외에는 구분 가능한 별자리가 없어서
요즘 대세인 스카이 사파리를 돌렸다
저녁 시각에 천정에 남중한 대상은 포말하우트.
남쪽 지평선 근처의 외로운 별이 여기선 하늘의 중심이라니...
내가 멀리 오긴 왔구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며 이름 모를 잔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젤란들도 이제 베일을 벗고 거대한 위용을 보여준다
마젤란이 이렇게나 컸었나?
그간 두 번의 호주 원정에서 항상 마젤란을 봤지만
성도와 아이피스를 바쁘게 오가느라
이렇게 멍하니 그 자태를 오랫동안 감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구름 두 덩어리를 찬찬히 내 눈동자에 새겨본다
밤 기온은 우리나라 가을 날씨와 비슷한.. 약간 쌀쌀한 정도.
퍼스에서 산 8천원짜리 침낭을 꺼내 입고
매트 위에 누웠다
피곤한 백인 커플은 랜드로버 2층 텐트에 들어간지 오래.
내가 누워있는 세상엔 벌레소리, 바람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다
완벽한 침묵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오로지 별빛만이 소리 없는 요란함으로 나를 반긴다
평소의 맑은 날이면 심심치 않게 보이는 유성들도 흔적도 찾을 수 없이 잠잠하다
그 대신 무수한 인공위성들이 하늘을 가로짓는다
조용한 아이, 바삐 지나가는 아이, 희미한 아이..
그 중에 1등급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보였다 안 보였다
황소가 눈을 꿈뻑이듯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천천히 시야를 가로질러 간다
스케이트를 타듯 유연하게, 하지만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이....
한동안 그 빛을 눈으로 좇으며 무아지경에 잠긴다
내가 보던 말던, 누가 눈여겨 보던 말던
이름 모를 위성은 제 갈 길을 찾아 그저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있구나....
그 위성이 북쪽 지평선에서 나타나서 마젤란들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하늘에는 완벽한 어둠이 내렸다
퍼스에서 동쪽으로 100km가 안 되는 거리 때문인지
기대했던 완벽한 black의 하늘은 아니었지만
온 하늘 가득 뿌려져 있는 작은 별들은
무슨 핑계도 댈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아아.. 별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가?
한시간 반 전까지는 지명도 알지 못하던 이 외딴 곳에서
나는 풀밭에 누워 침낭과 텐트 깔판에 의지하며
검은 하늘과 하얀 별들과 마주하고 있다
그래.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회사에서 어디 보내주지 않았다고 너무 서운해 할 필요도 없다
나는 내 의지로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밤 9시가 넘으니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집에서 파카 하나만 챙겨왔어도 좋았겠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야 소용 없는 일.
서 있으면 좀 덜 추울 것 같아서
가져온 맨프로토 055 삼각대를 길게 펴고
대륙에서 만든 70mm 쌍안경을 올렸다
뭘 볼까..
마젤란에서 동쪽, 용골자리(Carina) 아래쪽으로
육안으로 누가 봐도 '별이 아닌' 아이들이 나 좀 한번 봐 달라고 아우성이다
NGC 2516
SMC - LMC와 아름다운 각을 이루며 육안으로도 희미하게 보인다
70mm 쌍안경 10배율로 보면
처음 스키 배울때 자세인 A자 모양과 많이 닮았다
남쪽 하늘 초보인 Nightwid가 처음 만난 대상이 '스키 초보 성단'이라니.. ㅎ
운동에는 전혀 소질 없는 Nightwid.
스키도 아직 2516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NGC 2547
2516에서 조금 아래, 무언가 꼬물꼬물 하는 것이 보여서 쌍안경을 들이대보니
사람인(人) 자가 보인다
왼쪽 획이 너무 긴 사람 人
너무 욕심내지 말라는 뜻인가..
이거 뭐 인터스텔라도 아니고
하늘이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발부터 떠오르고 있는 오리온자리 밑으로
시리우스가 고도를 더해가며 점점 빛을 발한다
30도쯤 떠올랐을 즈음엔 너무 밝게 빛나는데다 깜빡이기까지 해서 진정으로 눈이 부실 정도.
남쪽 하늘에서 한 가닥 한다는 카노푸스도 아케르나르도 하늘 높이 떠 있었지만
시리우스의 위용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그 애들은 고도가 높아서 깜빡이지도 않는다)
(LMC 좌하단은 카노푸스, SMC 좌상단은 아케르나르)
쌍안경으로 시리우스를 보면 뭐가 보일지,
그냥 괜히 궁금해졌다 (흑점이라도 보일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70mm 쌍안경 안의 시리우스는
마치 서울 도심의 네온사인처럼 요란하게 반짝거린다
시리우스 건너편으로 북쪽 나뭇가지 사이에서 무언가 특이한게 반짝여서
뭘까 하고 찾아보니 플레이아데스 성단이다
너네는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그래도 나 따라 호주까지 동행해 준 것이 고마워서 함 봐준다
북위 37.5도에서 늘 보던 대상이지만
기분이 그래서 그런지 좀 달라 보인다
쌍안경 시야 안에 같이 아웃포커스로 보이는 나뭇가지도 운치 있고
알키오네를 향하는 한 줄기 스타 체인도,
알키오네 4중성도 모두 아름답다
[ M45 관측 스케치, 검은 종이에 젤리펜, 조강욱 (2011) ]
한참을 쌍안경을 가지고 놀다가
몸이 제법 덥혀진 것 같아서 다시 침낭 속에 들어가 누웠다
스카이사파리 어플을 night 모드로 만들고 별자리선과 그림을 올려서
밤하늘과 대조하여 하나씩 찾아본다
그냥 딱 보고 알아볼 수 있는 별자리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남중한 남쪽물고기 바로 아래로 두루미(Grus) 자리가 보인다
아.. 참 예쁘다 두루미..
아 에리다누스가 있었지
아케르나르를 찾아도 강줄기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니
별자리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하던 대로 오리온 리겔부터 강줄기를 짚어본다
에리다누스강 급류타기 놀이를 매일매일 할 수 있었는데..
아쉽구나....
성도도 안 챙겨왔지만 스카이 사파리가 있으니 걱정이 없다
희미한 붉은 빛에 비추어 보는 종이성도가 맛이 참 좋은데..
왠지 이른 미래에 벌써 구시대의 유물이 될 지도 모르겠다.
두루미와 에리다누스를 시작으로 옆 동네 친구들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다 보니 잠이 솔솔 온다
Phoenix, Indus, Hydrus.... 하다가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들었다
까만 원단에 깨알같이 반짝이를 붙여놓은 별이불을 덮고서..
무언가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마젤란들이 시계바늘 돌듯이 시계방향으로 돌아가 있다
지금 몇 시지..
폰을 켜 보니 자정을 향해 가는 밤 11시 16분,
별빛만이 흐르는 진공과도 같은 적막 속에
저기 어딘가.. 아주 멀리서 누군가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쾅쾅 쾅쾅
처음에는 벌레나 동물 소리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쾅쾅쾅 쾅쾅쾅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인지
분명히 사람의 짜증이 가득 담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한참을 거칠게 문을 두드리다가 어느 틈에 다시 조용해졌다
이제 들어갔나 보다.. 하는 사이에
다시 쾅쾅쾅쾅쾅
아 이건 좀 무섭네..
문 두들기는 소리에 오감을 집중한 사이에
하늘은 왠지 그 빛을 조금 잃었다
뭐지? 구름이구나. 엷은 구름.
피곤한데 좀 더 자야겠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아무리 잘 자고 와도
쉰 것 같지가 않다 (비즈니스는 다르겠지)
눈을 감으니 1997년 가을 치악산 폐교에서의 기억이 데자뷰처럼 떠오른다
아마 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에 서울에서 대학 천문동아리 활동을 했었다면
누구나 어디인지 알 것이다.
치악산 구룡사 폐교.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아직 알음알음으로만 대학생들 사이에
'치악산에 별 보기 좋은 폐교가 있다더라'는 소문이 돌던 시절..
군대 가려고 학교를 휴학하고 하루하루를 별보기로 채우던 나는,
UAAA 선배에게 지나가는 얘기로 들은
'치악산 구룡사 매표소 지나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폐교로 향하는 오솔길이 있다'는 정보만을 가지고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있을 평일 오후에
혼자서 한 손에는 뮤론 210, 8인치 카세그레인 반사를 들고
반대쪽 어깨에는 GP 가대를 들쳐 메고
가방에 성도와 무게추, 아이피스들을 가득 쑤셔 넣고
동서울 터미널에서 원주 가는 입석 고속버스를 탔다
(고속버스가 왜 입석이 가능했는지 잘 생각은 나지 않는다.
어스름한 저녁에 원주에 도착하여 41번 시외버스를 타고
밤 9시 치악산 구룡사 종점에 도착.
랜턴을 들 손이 없어서 (한 손엔 망원경, 한 손엔 가대)
그 랜턴을 입에 물고서 땀을 비오듯 흘리며 묻지마 등반을 시작했다
얼마나 올라가야 하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폐교에, 그 별천지에 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10분쯤 올랐을까? 정말 천벌신이 굽어 살피셨는지
도저히 길이라 생각하기 어려운 작은 샛길에 마음이 끌려서
그 길을 따라 짧은 언덕을 오르니
울창한 숲 속에서 기적같이 시야가 틔여 있는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아침에 보니 폐교 운동장이었다. 아래 사진은 최근에 찍은 듯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뵙고 싶었던 권오철님은 아직도 얼굴 한 번 대면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나서 망원경을 세팅하고 하늘을 보니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이 이미 하늘을 점령해 버렸다
아 이걸 어떡하지..
그냥 무작정 기다려보기로 하고 '밤하늘의 보석' 책을 베개 삼아
성도 클리어 파일을 이불 삼아 잠을 청했다
밤 11시, 땀으로 샤워했던 몸이 그대로 식어서 한기에 잠을 깼다
아직 하늘은 가망이 없다
다시 취침!
새벽 1시, 또다시 추위에 눈을 떴다
그리고 눈 앞에는, 망원경을 처음 만진 이후 1년 반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찬란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스무살이라 차도 없고 강원도에 가서 별을 볼 생각을 별로 해 보지 못했었다)
그 황홀한 하늘에서 새벽에 동이 틀 때까지 꿈과 같은 관측을 했던 그 밤.
처음 만나본 NGC 은하인 NGC 7331을 어렵게 잡고서 혼자 기뻐했던 것도,
NGC 2903을 관측하며 아이피스 안에서 박명을 맞았던 것도..
벌써 17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강렬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Brookton이란 시골 마을 인근의 한적한 캠핑장에서
자정을 향해 가는 시각에 풀밭에 누워
맑은 하늘이 나올 때까지 다시 잠을 청하려다 보니
여기가 치악산 폐교인지 서호주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다시 눈을 떴다
애타게, 또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던 사람은 집에 들어갔는지 포기했는지
더 이상 철문 두드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하늘에선.. 그러던지 말던지 겨울철 별자리들이 고도를 높여가며
아름다운 겨울 은하수가 하늘을 온통 가로지른다
아... 아름답다....
멍하니 한참동안 흘러가는 은하수를 그저 쳐다보고 있는데
멀쩡하던 은하수가 자동차 방향 지시등처럼 깜빡깜빡 보였다 말았다 한다
남반구산 별이불이 너무 포근하여, 은하수의 자장가가 너무 달콤하여
이 하늘을 두고도 잠이 쏟아진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체온도 떨어지는지 점점 몸도 한기가 심해진다
밤 기온 예보가 12도 정도로 추위를 느낄 만한 온도는 아닌데
확실히 추위란 상대적인 것 같다. (낮에 너무 더워서..)
아 춥다.. 차에서 자야겠다
토요타 RAV4의 뒷좌석 시트를 모두 눕혀서 공간을 확보하니
별로 길지 않은 내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울 수 있다
그리고.. 야외보다는 확실히 차 안이 훨씬 따뜻하다
트렁크 방향에 머리를 대고 누우니
트렁크 도어 창문을 통해서 오리온의 별들이 어지럽게 빛난다
차 안에서 이런 비현실적인 호강을.. 몇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지.
새벽 3시. 알람이 울린다
트렁크 도어 창문을 통해서 이름 모를 별빛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 참.. 예쁘네....
그러고는 잠에 취해 다시 취침.
다시 눈을 뜨니 이미 날이 밝았다
어 벌써 아침인가.. 내가 몇 시간을 잔 거야..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5시도 되지 않았다
차 밖으로 나오니 때마침 비너스벨트가 나를 반긴다.
이름만큼 예쁘기도 해라..
비너스벨트를 마중하러 도로변으로 나갔다
비너스 벨트를 보내니, 반대편 수풀 위로 태양이 나올 준비를 한다
나와 함께 그 첫번째 태양빛을 받은 밀밭
캠핑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여기가 자연보호 구역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일찍 일어난 김에 자연보호 구역 산책 한 번 해보자
이름 모를 같은 종류의 나무들이 빽빽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 나무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면 이름이라도 불러 주었을 텐데..
밤새 가끔 울던 애는.. 너냐?
빽빽한 숲 속에도 태양의 온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해가 올라오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구름이 온 하늘 가득 몰려왔다
그래.. 비행기에서 본 구름 상태로는 거의 가망이 없었는데..
하룻밤을 맑은 하늘 아래에서 온전히 보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겠지.
이빨도 닦아야 하고 떡진 머리도 감아야 하는데 어떡하지..
아침이 되어도 사람 구경은 할 수 없고
피곤한 커플은 정말 피곤한지 아직 인기척이 없다
24개 들이 600ml 생수 한 통을 꺼내서 양치를 하고,
자연에서 하는 세수.
열악한 환경이지만 사우나에서 뜨거운 물에 푹 담구는 것과는 다른 상쾌함이
온 몸에 전해진다
이 와중에 치간 칫솔과 가그린까지 마치고 머리도 말릴 겸 자외선도 피할 겸
텐트 안에 들어가서 모닝 맥주와 함께 관측기 도입부를 써 본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는 듯 하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북쪽으로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로밍폰으로 호주 지형에 강한 Telstra를 강제 설정해 놔도
신호는 전혀 잡히지 않는다
다음 원정에서는 USIM칩 사다가
아예 호주 현지 통신사에서 개통을 하는게 낫겠다
어디 가서 인터넷을 쓰지..
호주 아웃백에서도 곳곳의 타운에 맥도날드는 있고
맥도날드에선 예외 없이 공짜 WIFI를 쓸 수 있다
서호주 맥도날드 위치를 찾아보니
동쪽으로는 퍼스 근처에 50여개가 몰려 있고
서쪽으로는.. 흠.. 칼굴리(kalgoorlie)에 매장이 있네.. 거리가 음.. 570km!!!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남은 이틀 밤의 지역별 날씨를 확인해야 하니
오전 8시, 단촐한 짐을 정리하고 퍼스로 길을 떠났다
사진 한 장 남겨 주는 센스.
나는 Made in Italy (전투형) 055 들고 다니는 남자니까.. 아휴 무거워..
☆☆☆☆☆☆☆☆☆☆☆☆☆☆☆☆ 2편 끝 ☆☆☆☆☆☆☆☆☆☆☆☆☆☆☆☆
#1. 바람 좀 쐬고 올께요. 서호주에서
#2. 별이불이 제일 따뜻해
#3. 피너클스와 인도양, 쪽박과 대박 사이
#4. 자연의 창으로 우주를 바라보다
#5. 별 찾는 수도승
Nightwid 無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