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1 서호주 무계획 관측여행
#1. 바람 좀 쐬고 올께요. 서호주에서
#2. 별이불이 제일 따뜻해
#3. 피너클스와 인도양, 쪽박과 대박 사이
#4. 자연의 창으로 우주를 바라보다
#5. 별 찾는 수도승
2014년 11월 28일, Nightwid 조강욱
☆☆☆☆☆☆☆☆☆☆☆☆☆☆☆☆ Intro ☆☆☆☆☆☆☆☆☆☆☆☆☆☆☆☆
2014년 11월 18일은
내가 11년째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날이었다
개발부서로 입사해서 양산을 앞두고 며칠밤을 새며 서로 니 책임이라고 으르렁 거릴때도
영업부서로 옮겨서는 다 삶아 놨다고 생각했던 큰 수주건을 허망하게 놓쳤을 때도
지금 일하는 기획 부서에서 내가 구상한 사업전략이 임원께 질타를 받았을 때도
이렇게 절망적인 적은 없었다
내가 회사에서 갈망하던
(하고 있는 업무 외의) 단 하나의 원대한 목표.
바로 남반구로 2년간 장기 해외파견 근무를 나가는 것이었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되었음을 느끼고
최종 발표만 기다리던 마지막 순간,
자만심이지만, 나는 당연히 내 이름이 불리리란 것을 끝까지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인사부서에서 온 마지막 소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마지막 한 걸음이 부족해서,
또는 숨겨진 마지막 계단 하나를 끝내 찾아내지 못해서
내 인생의 원대한 계획 하나는 영원히 나에게서 멀어져 버렸다
하..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 종을 울려야 할까
선배가 사주는 쏘주를 마셔도 전혀 '술'맛이 나지 않는다
요즘엔 참이슬에 알콜 대신 설탕을 넣나?
집에서도 정신줄 놓고 있는 남편이 안쓰러웠는지
원장님이 어디 가서 바람 좀 쐬고 오라 하신다
별보러 강원도 어디 멀리 다녀올까
제주도에 함 가볼까
더 남쪽에 별 보일만한 데가 어디지
오키나와는 별보기가 어떨까?
아니 그럴 바엔 퍼스에 갈까
퍼스?
원장님께 퍼스에 가겠다고 하니
마음 정리만 된다면 얼마든지 다녀오라고.
세상에 이런 마나님이 또 어디 있을지..
설탕으로 만든 소주를 사준 부서장께도 월화 이틀 휴가 내고 바람 쐬고 오겠다고 하니 OK.
퍼스 가는 항공편을 목요일(11/20)날 알아보니
내일(금요일, 11/21) 밤 늦은 시각에 인천공항 출발해서
차주 수요일(11/26)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일정이 가능하다
목요일 오후에 하루 뒤 출발하는 항공편을 결제했다
내일이면 출발해야 하는데 항공권 말고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
심각한 플랜맨인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아래는 2010년 1차 호주원정에서 10분 단위로 짠 관측 계획이다)
하지만 무슨 계획을 세우기엔 아무 의욕이 나지 않는다
그저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남쪽 땅, 그것도 퍼스에 간다면
인생의 목표가 어긋난 것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될 수 있겠지
휴가 쓰는 것을 알려야 할 최소한의 사람들한테만 목적지를 알렸는데
퍼스라는 지명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숙식은 어떻게 해결하지?
아 몰라. 어떻게 되겠지
집에 가서 내일 호주 갈 짐을 챙기는데
계획이 없으니 짐이랄 것도 없다
밤 기온이 어떨지 몰라서 긴팔에 반팔에 옷만 잔뜩 챙겼다
☆☆☆☆☆☆☆☆☆☆☆☆☆☆☆☆ D-Day ☆☆☆☆☆☆☆☆☆☆☆☆☆☆☆☆
내 15인치 망원경을 챙겨갈 수는 없고.
병화형님께 아직 반납하지 못한 메그레즈 90을 가져가려니
그것도 아이피스며 마운트며 챙겨야 할 것이 많고
2012년 올해의 천문인상 부상으로 받은 70mm 쌍안경 개시 함 해봐야겠다
집에서 뒹굴던 전투형 055 삼각대까지 챙겨서 회사로 출발.
가는 것을 여럿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일련의 절차들은 비공개로 진행된 터라 그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양재역 무인 보관함에 캐리어를 넣어놓았다
점심 시간에 서호주에서 내 발이 되어 줄 렌트카를 예약하고 국제운전면허증과
입국비자를 급히 발급받았다
이건 현지에서 어찌 할 수 없는 거니까..
출발이 한나절쯤 남고 보니 슬슬 현지에서의 숙식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서호주 아웃백은 정녕 도로 외엔 아무 것도 없는 동네라
조난이라도 당하면 꼼짝없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내가 죽으러 가는 것은 아니니깐..
퍼스에서의 경험이 있는 이혜경 선생님, 별하늘지기 람이님, 황인준 형님께 연락하여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그리고 밤에 노숙하며 별 보기 좋은 포인트들도.
월 화 이틀간 내가 없어도 일이 되도록 최소한의 회사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벌써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졌다
공항 가는 리무진 버스 안에서
네이버로 급하게 서호주 캠핑여행 간 사람들 후기를 찾아본다
블로그 검색 중에 찾은 황금 같은 정보.
호주의 모든 캠핑사이트가 망라된 App이 있었다
"WIKICAMPS AU"
구글 지도에 수천개의 호주 내 캠핑 사이트 위치와 시설, 사용 의견과 사진들을
집단 지성의 형식으로 거대하고 리얼한 정보를 구축한 것이다
전국적인 무선통신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호주 내륙지역에서 낭패를 볼 수도 있기에
오프라인으로도 쓸 수 있도록 지도와 정보들을 폰에 모두 다운 받았다
아마 데이터 요금 아까워서 안 받아 두었으면
이번 여행은 불가능했을 듯.
밤 10시, 한산한 인천공항
별로 여유롭지 못하게 출국 수속을 하고
너무 늦어서 부모님과 장인장모님께 인사도 못 드리고..
그래도 이리 저리 뛰느라 땀에 절은 몸을 언제 씻을 수 있을지 모르니
탑승동 라운지에서 마지막 샤워를..
하지만 듣던대로 아시아나 라운지의 음식은 별로였다
서호주에 가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로 바빠서
하루 종일 굶었는데도 실망스럽게 느껴질 정도..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막 바뀐 00:15분, 싱가폴행 비행기가 출발했다
람이님이 올려주셨던 기내에서 본 거대한 은하수를 생각하고 일부러 남쪽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이거 영 신통치가 않다. 구름 위로 올라왔는데 말이야....
피곤까지 몰려와서 그대로 취침.
새벽에 스튜어디스가 밥 먹인다고 깨웠는데
혹시나 하고 하늘을 보니 이건 뭐 서울하늘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이거 뭔가요.. (잡광 차단이 중요한 것 같다)
새벽 6시 싱가폴 창이 국제공항 도착.
몰디브 신혼여행 이후 정확히 9년 하고 2일만의 재방문이다
환승을 위해 한참을 이동했는데 내가 갈 터미널을 찾기가 어려워서
Information center가 새벽부터 열었길래
어디로 가면 되냐고 앳되어 보이는 안내 여직원에게 물어보니
'저 쪽에서 스카이 트레인 타세요' 하고 완벽한 한국말로 대답한다
깜짝 놀라서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나한테도 운이 아주 없지는 않나 보다
(다른 터미널로 가는 스카이 트레인 안에서)
퍼스 가는 비행기로 환승하려면 한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하여
퍼스 근방의 날씨를 폭풍 검색.
근방 200km 내에서는 오늘(토요일) 밤날씨가 썩 좋지는 않을 것 같다
(퍼스에 날 데려다 줄 비행기)
퍼스행 아침 비행기는 이내 인도네시아의 군도를 지나서 남쪽으로 날아간다
꽃보다 청춘에서 40대 아저씨들을 맨몸으로 페루에 던져놔도
PD가 여행 가이드북은 쥐어줬던 것이 생각나서
출발일 점심에 서점에서 퍼스나 서호주 관련 여행책을 찾았는데
서호주는 그 흔한 가이드북 한 권이 없다
호주 여행 책자에도 겨우 퍼스 시내 몇 장 나온 정도..
(중증 별쟁이들 중에 퍼스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우리가 특이한 사람인건 맞나보다)
결국 가이드북이라 할 수는 없는 박자세의 서호주 탐사 기록집을 구입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보통의 가이드북보다 훨씬 좋았다
나는 관광하러 가는 것은 아니니까....
착륙 두 시간 전, 드디어 호주 북서부의 대륙이 보인다
시뻘건 땅. 인공의 흔적은 희미한 실선의 도로들 외에는 찾을 수 없다
내가 진짜 호주에 온 것 맞나 혹시 화성이 아닌가 괜한 상상도 해본다
그러나 착륙 한 시간 전, 퍼스에 가까워질수록
땅에는 녹색이 많아지고 하늘에는 구름도 많아진다
착륙 30분 전부터는 지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
아 이걸 어떡하지.. 이 정도면 오늘 어디 가도 별을 보기 어려울텐데..
그 사이 깨알같이 기내식을 챱챱
맛있었다. 며칠간의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하니 더 애틋했는지도 모른다
구름을 뚫고 내려와 퍼스 시내 관측
도착.
핑크색으로 입국 카드를 썼다가 빠꾸 맞고 다시 쓰느라 입국 수속만 한참이 걸렸다
(검은색이나 파란색 펜으로만 써야 한단다)
보기에 좀 없어 보였는지 짐 검사도 없이 세관 통과
(지난번 호주 입국시엔 마약류(?)로 의심되던 내 파스텔을 확인하기 위해 캐리어를 열었다)
하아.. 진짜 왔네..
그렇게 열망하던 곳을 이렇게 오게 될 줄은
그저께 아침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지.
아무 계획도 없이 완전히 맨몸으로 말이야.
그렇게 입국 게이트를 통과하여....
나는 퍼스에 도착했다.
☆☆☆☆☆☆☆☆☆☆☆☆☆☆☆☆ 1편 끝 ☆☆☆☆☆☆☆☆☆☆☆☆☆☆☆☆
1411 서호주 무계획 관측여행
#1. 바람 좀 쐬고 올께요. 서호주에서
#2. 별이불이 제일 따뜻해
#3. 피너클스와 인도양, 쪽박과 대박 사이
#4. 자연의 창으로 우주를 바라보다
#5. 별 찾는 수도승
Nightwid 無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