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성 각결막염입니다"
어느날 눈이 붓고 심하게 충혈되어서 간 병원에서는
유행철도 아닌데 유행성 결막염에 왜 걸렸느냐 한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요 ;;;;
별 보는 왼쪽 눈이 날이 갈수록
12라운드를 마친 권투선수처럼 부어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안구건조는 베이스로 깔고 각막박리에 황반변성, 녹내장 의증에 이젠 각막염까지..
왜 별 보는 왼쪽눈만 계속 아픈거지?
별에서 유해물질(?)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와중에도 잡혀있는 일정들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
빨간 눈을 해가지고 주말마다 전국 각지로 돌아다녔다
운전도 하기 어렵고 관측도 불가능하여 차도 안 가지고 버스타고
몇 주간 장비도 없이 횡성 천문인마을과 용산, 예천, 그리고 대전으로..
눈은 안 보여도 입은 멀쩡하니까.. ㅎ
9/4 토요일 천문인마을에서의 천문학회 경기지부 연수.
눈도 잘 안떠질 지경이라 동서울에서 버스를 탔다
예보 상으로는 도저히 걷히지 않을 구름이 오후 늦게부터 개이기 시작하여
저녁 강의가 끝날 무렵에는 완벽하게 맑은 하늘이 되었다
올해 천문인마을에서 있던 날들 중 가장 맑은 하늘.
밤새도록 불을 켜놓고 있던 옆집도 오늘은 왠일로 불을 껐는데
하늘에 엄청난 불이 하나 켜 있었다..
보름을 향해 가는 달.
그 광해의 위력은 익히 잘 알고 있지만
강원도 산골의 달은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서울의 달과 감히 비교도 되지 않는다
연수 받는 분들은 그 달빛 아래서도 감사하며 조별로 모여 은하며 성단을 찾는다
난 눈도 잘 보이지 않을 뿐더러 혹시 결막염 옮을까봐 아이피스는 쳐다도 안 보고
천문인마을 테라스에 자리잡고 앉아서
그 배부른 달과 풍경을 한 장 그려본다
[ 천문인마을, 달. 갤럭시노트2에 S펜과 손가락 (조강욱) ]
내가 천문인마을에서 달을 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안 난다기 보다는
달 뜨는 날 천문인마을에 갈 이유가 없었지
횡성의 시골 하늘,
그 맑은 하늘에서 보는 달과 달빛에 비친 풍경은 그 자체로도 매력이 있다
관측의 방해물, 광해 덩어리로만 생각했던 달.
망경으로 보고는 이걸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한숨짓던 넘사벽의 달.
근데 맨눈으로 멀리서 욕심없이 그저 바라보고 있으니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대상으로 다가온다....
월몰 이후 새벽 늦게 은하수를 보려고 생각했으나
자정이 넘으니 눈은 더 아파오고
눈을 감고 술을 마시니 잠도 솔솔 온다
어짜피 눈도 잘 안 떠지는거.. 은하수는 꿈 속에서.
며칠 뒤 수요일, 3년만에 다시 돌아온 개기월식이다
오늘은 신혼여행 가신 과학동아천문대 대장님 대신
천문대 행사를 도와드리기로 했다
빨간눈은 조금 나아졌지만 결막염이 각막까지 번져서
뭘 보려면 내 주안인 왼쪽 눈을 감아야 한다
개기월식의 달이 내 빨간 눈을 위로해 주려는 듯 더욱 붉게 빛난다
이 날 용산 과학동아 천문대에는 실로 많은 인파가 몰려왔는데
그에 반비례하여 내가 하늘 볼 여유는 거의 내지 못했다
일식을 눈으로 보는지 코로 보는지 모르게 바쁜 와중에
그래도 2011년 겨울의 경험,
개기월식 달 뒤로 보이는 무수한 별들을 다시 찾아보려 하니
용산에서는 배경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식은 그게 최고의 관전 포인트인데....
내년 4월 월식은 시골로 깊이 들어가서 조용히 봐야지 ㅠㅠ
[ 식심, 과학동아 천문대. 갤럭시노트2에 S펜과 손가락 (조강욱) ]
그 다음주 토요일(10/18)은 예천천문우주센터에서 천문학회 서울지부 연수.
눈은 빨간색에서 이제 거의 흰색으로 돌아왔지만
눈에 우유를 잔뜩 집어넣은 듯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운전은 무리일 것 같아서, 관측도 안될 것 같아서
강의 준비도 할 겸 동서울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갔다
예보는 맑음. 1년만에 찾은 예천천문우주센터는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듯..
서울지부 3급 연수에는
별하늘지기 가학팀 주요 인사(?)들이 모두 조장으로 포진해 계신다
일찍 도착하신 허기행님 정성훈님 등 여러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후 내내 떠들고 나니 밤이 되었다
허기행님이 한마디 건네신다
"30분만 가면 문예단인데.. 가실래요?"
"끼약!!!!"
어떤 곳일까 궁금했던 문예단이 지척이라니.
그리고보니 문예단이 문경 단양 예천의 줄임말이지..
결국 운영진 연수생 모두 40여명 대집단이 문예단으로 출동!
문예단 가는 길은 꼭 보현산 올라가는 길을 연상케 한다
쉼 없는 급커브 경사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을 크게 틀어놓고 미친 사람처럼 흥얼거리며
보현산을 올랐던 작년 여름의 기억이 문득 생각난다
문예단 정상. 허기행님 차에서 내리는 순간,
암적응도 필요 없이 거대한 은하수가 온 하늘을 압도하고 있다
아!
올해 본 가장 아름다운 밤하늘이다 (관측을 몇 번 하질 않아서.. )
하지만 나는 내 관측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온지라
망경도 없이 완전히 맨몸이다. 관측 장비로는 오로지 성도등 하나
아~ 하고 침흘리며 하늘 보고 있으니
허기행님이 조강욱씨 오늘 이거 쓰라고 쌍안경과 캠핑의자를 빌려주신다
이 은혜는 또 어떻게 갚아야 할지 ㅠ_ㅠ
빌려주신 의자에 반쯤 누워서 멍하니 은하수를 바라본다
아무런 조급함도 목표의식도 없다
평소 같으면 정신없이 망경 세팅하고
미러 냉각도 되기 전에 대상 찾고 점 찍고 있었을텐데
오늘은 누워서 하늘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밤하늘을 감상한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곰곰히 생각해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별을 보기 시작한 이래
20여년간 망원경 없이 별하늘 아래 있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를 다그치고 피곤하게 만드는 내 성격상
맑은 하늘에서 망원경이 있는데 그걸 외면하는 것은 나에겐 불가능힌 일.
지금 내 망원경은 300km 북서쪽 서울에 있다
나는 그저 누워서 하늘만 바라볼 뿐..
밤하늘의 별들이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가끔은 망원경 없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
[ 망원경이 무슨 필요, 갤럭시노트2에 S펜과 손가락 (조강욱) ]
누워서 하늘 보다가
지부장님 쌍안경으로 연수생 분들 관측 실습 도와주다가
여기저기 별쟁이들 기웃기웃 하는 중에
12시가 넘으니 대부분의 연수생들은 베이스캠프로 철수하시고
문예단 정상에는 나와 조장님들,
그리고 저 아래쪽 주차장에 별하늘지기 대부도팀 분들만 남았다
문예단에 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옷도 하나도 안 챙겨온 나는
여기저기서 동냥받은 거위들로 남부럽지 않은 방한대책을 마련하고
캠핑의자에 누워 본격 감상 모드.
문예단은 사방이 높지 않은 산들로 둘러쌓여 있는데,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이 기가 막히게 예술적이다
쌀쌀한 가을 하늘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예쁜 나무들.
마치 스태리나잇이나 스카이사파리의 지상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
정성훈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김광석 노래가 흘러나오길래 그 옆으로 의자 이동.
남쪽 하늘을 보며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하고 따라 부르고 있으니
서성훈님이 다가오신다
"근데 누구세요?"
ㅎㅎㅎ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온 애가 베이스캠프로 철수 안하고
아직도 누워있을 것이라 생각 못하셨을듯 ㅋㅋㅋ
문예단은 남쪽 시야가 좋아서 보통은 산에 가려 보기 힘들던 별들이 보인다
토끼자리 밑에 비둘기도 보이고
그 옆에는 에리다누스가 총총히 박혀 있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거대한 강은 Achernar 바로 위, Acamar 근처에서 끝난다
(자료 출처 : 구글 검색)
카노푸스가 남위 52도, 아케르나르가 남위 57도니
우리나라에서는 안 보이겠지..
나는 몰디브 신혼여행에서 아케르나르를 처음 본 이후
에리다누스강자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원정이든 관광이든 출장이든
남쪽으로 갈 일만 있으면 습관적으로 아케르나르를 찾는다
에리다누스는 아케르나르가 있어야 패션의 완성이니까..
그러나 맑은 문예단의 남쪽 하늘은 패션의 완성이 되지 않아도 충분히 멋지다
나에게 겨울 밤하늘의 제왕은 오리온이 아니라 당연히 에리다누스.
(보일 만한 하늘에서만)
오리온을 가릴 듯 말듯 아름다운 나무와 한 장.
[ 겨울의 제왕, Eridanus. 갤럭시노트2에 S펜과 손가락 (조강욱) ]
2시 10분에 지평선에 등장했을 달은
3시가 되어가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일출보다 일몰을 훨씬 많이 본 것처럼,
달도 월출보다 월몰을 수십배는 더 많이 보았다 (별쟁이라면 당연한 얘기)
오늘은 어짜피 망원경도 없는거,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누워 월출을 기다린다
동쪽 산 위로 날카롭게 올라오는 얇은 달을 기대했으나
그 쪽에만 낮은 구름이 있었는지
달은 산능선 바로 위 구름 위에서 한쪽 귀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름답다..
문예단의 스텔라리움 배경 위로 떠오른 황홀한 그믐달.
에리다누스가 겨울의 제왕이라면
그믐달은 새벽의 여왕이 아닐까?
[ 여왕님 입장, 갤럭시노트2에 S펜과 손가락 (조강욱) ]
달이 떠올라도 은하수는 빛을 잃지 않는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흘러 나오는 김광석 노래를 들으며
그믐달과 에리다누스와 은하수, 그리고 문예단의 나무들을 그저 지켜본다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 내리는
못다한 날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김광석,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달이 고도를 올리며 모두 장비를 정리하고
빅크(이강민) 작가님과 프로필 사진 놀이를 한참 하고
지는 별빛 바라보며 새벽 4시 넘어서 퇴근.
그 좋은 하늘에서 맨눈으로 빈둥거리며 밤을 샜지만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나에게는 처음 겪는 신세계, 강제로 맛보는 천국의 맛이랄까.
지난 주말 (10/25)에는 대전 천문연구원에서 전국학생천체관측대회 본선이 있었다
16개 시도에서 치른 예선전에서 순위권에 든 중고교 학생들만 치르는 결선.
올해는 내가 관측 문제를 출제하게 되어
그동안 학생천체관측대회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어려운 대상들을 다수 포함했다
대전에서 4인치로 도전할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일지,
그것에 치열하게 도전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윤호씨 / 무교수님과 같이 협의하며 문제 난이도를 가다듬었다)
토요일 아침, 윤호씨 차를 얻어타고 대전 가는 길에 조수석에서
우주의 기운을 느끼며 트윈스 우승 기원 그림도 한 장 완성하고
[ 트윈스 우승 가자, 갤럭시노트2에 S펜 (조강욱) ]
대전 천문연구원에 도착하니 푸른 하늘이 관측대회의 기대감을 한껏 높여준다
올해 9~10월엔 맑은 날이 너무나 많았다
여름의 암울했던 회색 하늘을 회상해 보면..
'청명일 보존의 법칙' 이라도 있는게 아닌가 싶다
정신 하나도 없이 빡빡한 낮 일정을 마치고 저녁이 되었다
일몰 직후 D+1일 달을 찾았으나 실패.
이 정도 정성으로는 어림 없는 것 같다.
그간 천문연구원에서 본 가장 맑은 하늘은
시시각각 색깔을 바꿔가며 박명을 향해 간다
하늘은 염소자리 alpha를 육안으로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다
출제한 관측 문제를 배포하고
50분씩 두 번, 1시간 40분에 걸쳐서 40개 대상을 찾았다
작은 망원경에 미동나사도 없는 적도의로 기가 막히게 잘 찾는 학생도 있고
맨땅 잡아놓고 '무언가' 있다고 주장하는 애들도 있다
그만큼 간절하게 우승을 바라는 것이겠지
초반 10분이 지나 이제 쉬운 대상을 다 넘으니
천문연구원 주차장은 바삐 성도 뒤지며 토론하는 소리로 가득하다
뜨거운 열기. 차가운 늦가을 공기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호핑과 관측에 몰입하는 어린 학생들..
내가 낸 어려운 대상들을 찾느라고 쉼없이 움직이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니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다
그 중에 한 학생이 눈에 띈다
사방에 성도를 낱장으로 펼쳐놓고, 암등이라 하기엔 너무 밝은 성도등으로
무릎 꿇고 앉아서 정신없이 호핑길을 찾고 있는 여학생.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어서 성별은 구분할 수 있다)
[ 뜨거운 호핑, 갤럭시노트2에 S펜 (조강욱) ]
내가 이렇게 뜨거운 열기로 혼신의 호핑을 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한참 도전대상을 뒤질 때 그랬을 거고
아마 마라톤 할 때는 나도 이렇게 찾았겠지?
같은 시각 운두령에서는 호주급 밤하늘이 펼쳐졌지만
나도 어린 학생들에게 큰 영감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
밤 10시쯤 관측대회는 종료되고 심사위원 중 대다수는 무주로 출발.
김철규님 올해의 천문인상 받으신 걸 알았으면 나도 가서 축하 드리는 건데.. ^^
맑은 하늘에서 각막염 걸린 맨눈으로 함께 한 10월이 이제 가고 있다
폰그림도 10월에 그린 것만 16장이 넘었다
한솔형님 관측 5번 나갈 동안 메시에 스케치 진도 한 개도 빼지 못했지만
대신 맨눈으로 보는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강제 체험할 수 있었다
이제 눈도 다 나았으니 다시 아이피스 보며 점찍기 놀이를 시작하겠지만
천문인마을의 눈부신 달빛과
개기월식의 오묘한 붉은색,
문예단의 아름다운 별과 달과 나무
그리고 학생들의 뜨거운 열기는
아마도 내가 별을 보면서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그냥 눈으로 보는 하늘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우리는 무엇을 찾아 망원경과 밤새도록 하늘을 떠도는 것일까..
Nightwid 無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