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tro News Serial No 10. Vol No I
Aug. 2012
<목 차>
I. Life with Kaas
고대 지식체계, 그 경이로움과 불가사의
(1) 2100년 전의 휴대용 스텔라리움 - Antikythera Mechanism
1. 폭풍이 깨운 2000년 동안의 수면
2. 앞면 장치의 의미
3. 뒷면 장치의 의미
i) 메톤 주기
ii) 캘리퍼스 주기
iii) 사로스 주기
iv) 엑셀리그모스 주기
v) 올림픽 개최 주기
4. 내부구조 및 복원 노력
5. 명품 시계의 원조 Archimedes
i) 제작자에 대한 역사적 기록
ii) 위대한 천재 Archimedes
(2) 단절된 고대지식 – 불가사의한 세계지도
1. Piri Reis 대서양지도 – 1513년
2. Oronce Fine 세계지도– 1531년
3. Mercator 세계지도 – 1538년 및 1569년
4. Buache 남극대륙 지도 – 1737 년
5. Hadji Ahmed 세계지도– 15597 년
II. Not Essential But Beneficial
G = 6.67384 x 10−11 N m2 / kg 2
G = 6.67384 x 10−11 m3 kg -1 sec -2
(1) 고전 물리학의 고전 Principia
(2) 흑사병 없었으면 Newton의 만유인력도 없었다
(3) 큰 물에서만 힘 쓰는 중력
(4) Cavendish가 잡은 새우로 고래를 건지다
III. Surprise & Mystery
색즉시공 공즉시색 – Twin Quasar
(1) 같이 출발한 빛, 도착은 417일 차이
(2) 60년간의 Einstein 인내력 테스트
(3) 실상, 허상 그리고 인식론
IV. Journey to Deep Sky
Black Hole 사진 찍기
(1) Black Hole 도 Deep Sky 인가
(2) 우리은하에는 블랙홀이 몇 개나 있을까
1. 우리은하 “블랙홀의 제왕” Sagittarius A*
2. 나머지 18 개 블랙홀 제국들
(3) 블랙홀 Cygnus X-1 과 동반성 HDE 226868
V.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조물주의 물수제비 놀이 – Messier / Messier A
(1) 조물주도 수제비 만들어 드시나 ?
(2) 평범한 실험, 비범한 결과
(3) 같은 자리 두 번 맞추는 절묘한 기술 Messier A
<본 문>
I. Life with Kaas
고대 지식체계, 그 경이로움과 불가사의
가끔 옛날 유물에서 놀랄만한 수준의 과학적 증거가 나올 때마다 학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당연히 진품 여부를 가리는 일이다. 많은 경우에 세상의 이목을 끌어 돈 좀 벌어 보려는 위작들로 판명되지만, 진품들 중에서도 발전단계의 연결고리가 없는 경우도 많이 발견된다. 이 경우 위작시비가 끝나지 않으면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박물관
창고에 처박혀 무기한 빛을 보지 못하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저는 아주 오랜 과거에 살았던 고대인들이 지금 우리가 역사적 고증을 통해 추정하는 사실들 보다 상상 이상으로
훨씬 엄청난 과학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과학이든 인문, 사회과학이든 모두 실증과 고증으로 증명되어야만 사실 및 진리로 학계에서 인정된다. 그러나, 비록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 증명되지 않거나, 증거가 충분치 않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는 것이 제 생각이다. 어떤 사실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유연함이 아무래도 건강에 좋을 테니까.
사실 지금까지 모든 칼럼이 “하늘만 쳐다보는” 내용들이었다. 하늘만 보아 오셔서 고개도 아프실 테니 목 근육도
풀어 주시고 분위기 전환도 할 겸, 이번에는 고대 기계장치 및 중세 세계지도의 두 가지 유물을 차례로 살펴본다.
(1) 2100년 전의 휴대용 스텔라리움 - Antikythera Mechanism
<Antikythera Mechanism 복원 후 구조도>
위의 그림은 <안티키테라 메카니즘> 으로 불리는 기계장치를 1951년부터 2010년 까지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복원한 구조도이다. 여기서는 부르기 편하게 <안티키테라 장치> 라는 말을 사용한다. 지중해 쪽빛 바다 상상하시면서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구경 한번 가보시지요.
이 유물은 지금부터 무려 112년 전인 1900년에 발견되었으나, 1951년부터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어 2010년에야
그 비밀이 거의 벗겨졌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고 최근 영국 BBC 방송에서 다큐로 제작되기도 했다. 저는 여행 중 기내에서 BBC 다큐를 접하게 되었으며, 귀국 후 자료를 정리해서 칼럼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미 이 유물에 대해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기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일견해 주시기 바랍니다.
1. 폭풍이 깨운 2000년 동안의 수면
1900년 10월, 그리이스 잠수부들이 해면을 채취하기 위해 안티키테라 섬 주변 해역에서 작업하던 중, 폭풍예보를
듣고 며칠 기다리고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후 다시 작업을 시작했는데, 며칠 전에는 보이지 않던 여러 유물들이
바다 밑바닥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폭풍이 바다 밑바닥 모래를 쓸고 나가, 이전에는 모래 속에 묻혀 있던
난파선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티키테라 섬은 그리이스 반도와 크레타 섬 (Crete) 사이에 있다.
그 이후 2년 동안 헤라클레스 및 황소 조각상, 청동 Lyre, 물항아리 (Amphora), 귀금속 세공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인양되었다. 이후 인양에 참가한 몇몇 다이버들이 잠수병으로 사망하고, 더 이상 유물도 발견되지 않아 1902년 말
인양이 공식 중단되었다. 1964년에 선박에서 뜯어낸 나무파편으로 탄소연대측정 했는데, 이 배는 BC 220 +/- 43
년의 나무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여러 결과를 종합한 결과, 이 배는 로마의 Sulla 장군이 BC 86년에 그리이스
에서 로마로 전리품을 싣고 가던 중 침몰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안티키테라 섬 위치. 그림 : Humitsubako>
<안티키테라 장치의 인양된 유물 파편들>
인양된 유물들은 일단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of Athenes)> 에 보관되고
있었다. 1902년 5월 17일, 고고학자 Valerios Stais 가 이 유물들을 연구하던 중, 제일 큰 파편에서 시계에서나 볼 수
있는 기어장치 (톱니바퀴) 가 있는 것을 발견해낸다. 드디어 인류 최초의 컴퓨터가 2000년의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1974년, 미국 Yale 대학 교수 Derek de Solla Price 는 이 장치가 BC 87 년에 제작되었고, 그 다음해 이 배가 침몰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이 장치는 휴대가 가능한 크기 안에 현재 30개 (또는 인양 안된 것 포함하면 37개로도 추정) 의 기어가 들어가 있으며, 아래의 천문사항을 천동설 (Geocentric Theory, 지구 중심설) 기준으로 정확히 예측할 수 있어, 인류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라 불리고 있다.
1. 일식, 월식 날짜 예측, 올림픽 개최일 산정
2. 지구에서 본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날짜별 공전궤도상 위치 표시.
3. 달의 위상 날짜별 표시.
4. 별 및 별자리의 출몰 표시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주요 파편들>
2. 앞면 장치의 의미
1800년대에 유럽에서 선을 보인 천문시계가 이 장치와 비슷한 기술 수준의 기계라고 한다. 미국 Cardiff 대학의 Michael Edmund 교수는 이 장치가 디자인도 훌륭하고 천문력이 정확히 맞는다는 점에서 모나리자 그림보다 더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Derek de Solla Price 교수 연구를 토대로 복원한 복제품이 아테네 국립 박물관에 같이 전시되어 있다. 또 다른 복원품들은 아래 장소에서 볼 수 있다. 이 지역 여행하시면 꼭 한 번 보시기 바랍
니다.
미국 Montana American Computer Museum in Bozeman
미국 New York Children’s Museum of Manhattan
독일 Kassel Children’s Museum
프랑스 Musee des Arts et Metiers
<앞면을 복원한 컴퓨터 illust>
외부 크기는 340 x 180 x 90 mm (H x L x W) 이고, 내부에는 발견된 기어만 30개가 내장되어 있다. 제일 큰 기어는 140 mm 직경에 224 개 톱니가 있다. 이 장치는 발견 당시 82개 파편으로 부서져 있었고, 6개 조각에 기어가 설치되고 문자도가 새겨져 있다. 금속재료는 부식이 심해 정확한 분석이 어렵지만, 구리 95 % 주석 5 % 합금으로 추정된다. 장치에 새겨진 문자는 BC 5 세기 후반부터 그리이스 전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해서 그리이스 표준어가 된 Koine Greek (코이네 그리이스어) 이다. 참고로 최초의 성경인 신약성서도 이 언어로 기록되었다.
외부에 붙은 손잡이는 내부의 제일 큰 기어 (전시된 유물의 중앙에 보이는 것) 에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을 돌리면
내부의 모든 기어들이 같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앞면에는 인양 당시 1개 다이얼에 2개의 Pointer (시계바늘) 가 있었다. 그러나 새겨진 글자를 보면 8개의 Pointer
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날짜를 표시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7개의 공전궤도상 위치를 표시한다. 그러나 나머지 6개 pointer 는 발견되지 않아 추정만 할 따름이다. 컴퓨터로 재현한 모습은
위와 같다.
앞면 2개의 동심원 눈금 중 바깥쪽 다이얼은 이집트 역법상의 1년인 365일 표시한다. 안쪽 다이얼에는 황도 12궁 (Zodiac) 이 표시되어 있다. 이집트 역법 표시 다이얼은 1 태양년이 365.2422 일 이므로 4년 마다 남는 약 1일을 수정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Vega, Taurus, Hydes, Pleiades, Gemini, Altair, Arcturus 같은 별이나 별자리 들이 새벽, 아침 또는 저녁에 뜨고 진다는 내용이 간단히 새겨져 있는 것이 흥미롭다. 또한 특정 별들의 출몰 시간을 나타내는 Parapegma 가 표시되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천문력이다.
3. 뒷면 장치의 의미
뒷면은 앞면에 새겨진 내용보다 더욱 상세하고 복잡하다. 아마도 복잡한 내용을 앞면에 적어 놓으면 보는 사람이
처음부터 짜증날 것을 우려한 배려인 듯하다. 아래에 말씀 드리는 역법 및 주기 관련 내용은 저도 아는 바가 일천
하므로 최소한의 의미만 살펴보고 지나 가겠습니다. 뒷면에 적인 내용들은 2008년 <Nature> 지에 실린 논문으로 그 “깊은 뜻” 이 비로소 밝혀졌다.
<뒷면을 복원한 컴퓨터 illust>
뒷면에 보이는 5 개 다이얼은 5 개 천문주기를 나타내는데, 아래에서 그 내용을 살펴본다.
메톤 주기 (Metonic Cycle)
캘리퍼스 주기 (Callipic Cycle)
사로스 주기 (Saros Cycle)
엑셀리그모스 주기 (Exeligmos Cycle)
올림픽 개최 주기 (Olimpiad Cycle)
i) 메톤 주기
o 그리이스 Meton 이 BC 433 년 발견.
o 19 태양년 또는 235 삭망월 (235 x 29.53059 = 6,939. 6887 일).
o 지구와의 상대적인 위치에서 달이 같은 위상을 되풀이하는 19년 주기.
o 달의 삭과 망이 해당 해 (年)의 같은 날짜에 돌아옴.
o 자세한 내용은 지난호 (Serial No 9, Blue Moon 칼럼) 참조.
메톤주기 다이얼은 사진의 위쪽 큰 다이얼이다. 이것은 235 삭망월로 된 19년 달력으로, 각각의 삭망월은 235개의 사각형 칸으로 구분되어 있고 연속 동심원의 5 겹 줄로 되어있다.
ii) 캘리퍼스 주기
o 그리이스 Callipus 가 메톤주기 발견 후 103년이 지난 BC 330 년에 메톤주기를 수정,
보완하기 위해 고안.
o 1 태양년은 365. 2422 일이므로 남는 0.2422일을 처리하기 위한 것.
o 4회 메톤 주기에서 1일 뺀 주기 로서 76 태양년에서 1일을 제외한 것.
캘리퍼스 주기 다이얼은 위쪽 큰 다이얼 내부의 왼쪽 작은 다이얼이다. 76년 주기를 표시하며
메톤 주기의 4배를 표시하기 위해 십자선으로 원이 4개로 구분되어 있다.
iii) 사로스 주기
o 신바빌론제국 시대 (BC 626~BC 539) 에 발견되었다고 전해짐
o 223 삭망월 (223 x 29.53059 = 6,585. 3215 일), 약 18년 11일
o 또는 14평년 + 4윤년 + 11.3215일 혹은 13평년 + 5윤년 + 10.3215일
o 어떤 시점에서 일식, 월식이 일어났다면, 1 사로스 주기 후에는 태양, 지구, 달이 공전궤도
위치에서 같은 위치에 온다. 그런데 사로스 주기가 만일 정확히 6,585일 이면 같은 위치
에서 이전과 같은 모양의 일식, 월식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는 0.3215 일 (약 8시간)
때문에 이 8시간 동안 지구는 약 120도 자전 하므로 일식이 관측되는 지역도 120도 동쪽
으로 이동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Exeligmos 주기가 고안되었다.
사로스 주기 다이얼은 아래쪽 큰 다이얼이다. 각각의 삭망월은 223개의 사각형 칸으로 구분되어 있고 연속 동심원의 4 겹 줄로 되어있다. 이 다이얼은 일식과 월식 날짜를 예측한다. 사각형 안에는 모두 51개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38회의 월식과 27회 일식 주기를 나타낸다. 더욱이 보름달이 뜨는 주기도 포함되어 있다.
iv) 엑셀리그모스 주기
o 그리이스에서 BC 100년 경 고안됨
o 사로스 주기에서 차이 나는 8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사로스 주기를 3배 한 것.
o 669 삭망월 이다. (223 삭망월 x 3 = 669 삭망월 = 약 54 태양년 + 33일)
o 지구의 어떤 지점에서 일식, 월식이 일어났다면, 1 엑셀리그모스 주기 또는 3 사로스
주기 후에는 지구의 같은 위치, 같은 시각에, 같은 모양의 일식, 월식을 볼 수 있다.
엑셀리그모스 주기 다이얼은 아래쪽 다이얼 내부에 있는 작은 다이얼이다. 이것은 사로스 주기의 3배로서 54년 주기이다. 원이 3개로 구획되어있다. 상형문자로 표시된 사로스 주기 다이얼에 몇 시간을 추가해야 정확한 일식이 되는지를 사로스 주기 바늘이 알려준다.
제가 이 칼럼 쓰면서 하도 이상해서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아직 시원한 대답을 찾지 못한 부분이 있다.
아래 내용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장치 제작자로 추정되는 Archimedes 는 BC 212 년 사망했다. 그런데 엑셀
리그모스 주기는 BC 100 년 경에 고안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Archimedes 가 혼자서 이를 1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하기야 고대 지식체계의 역사적 기록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이 장치를 열심히 설명한 많은 자료들이 이 부분은 설명하지 않고 지나가니 답답할 따름이다. 이 주기를 누가 처음 고안했는지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지식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가 <연대기> 에 쓸데없이 집착하는지도....
v) 올림픽 개최 주기
올림픽 개최 주기 다이얼은 위쪽 큰 다이얼 내부의 오른쪽 작은 다이얼이다. 원은 십자선으로
4개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구역에는 Year 1/ 2 / 3/ 4 라는 연도표시와 더불어 올림픽 게임이름이 새겨져 있다.
<뒷면 위쪽 다이얼 부분. 큰 동심원 5겹줄은 메톤 주기 표시.
내부의 십자선 4구획으로 구분된 작은 원은 올림픽 주기 표시.
뒷면을 복원한 컴퓨터 illust>
4. 내부구조 및 복원 노력
이것이 발견되었을 때 많은 학자들은 내부 기계장치가 너무 정교해서 이 배에 실렸던 것이 아니고 후대에 제작된
것이 어떤 이유로 같이 발견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50년이 지난 1951년부터 Derek de Solla Price 교수가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해서 1959년부터 놀라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기어 형태는 이등변 삼각형이며, 기어 간격 (Pitch) 은 224 톱니가 있는 기어만 2 mm 이고 나머지는 모두 1.6 mm
이다. 기어 위치에 따라 태양, 달, 행성을 제어하는 기어들로 구분된다. 기어들이 적당히 작은 크기로 제작된 것으로 미루어 휴대용이란 가설이 유력하다. 또한 뒷면 뚜껑에 설명서처럼 보이는 글자들을 새겨 넣은 것을 보면 전문 천문학자를 위한 것은 아니고, 일반인을 위한 장치인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의 기어 배치도>
<내부의 기어 설계도>
놀라운 점은 당시의 기계공학 수준이다. 여기에는 두 기어 간격이 떨어진 경우에 그 사이에 설치해서 기어 속도는
변하지 않고 두 기어를 같은 방향으로 회전시키는 Idle 기어를 비롯해서, 한 기어는 고정되어 있고 다른 기어는 그 주위를 도는 Epicycle 기어 등이 적재적소에 고루 사용되었다. 이 같은 기어들은 지금도 자동차 변속기 등에 사용되는 기어들인데, 천문학도 그렇지만 당시에 이미 다양한 종류의 기어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Derek de Solla Price 는 1971년에 미국 Yale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최초로 X-ray로 내부를 촬영해 기계장치의 작동원리를 알게 되었다. 이후 Robert J. Deroski 및 Allan George Bromley 등이 Price 연구를 바탕으로 복제품을 만들어 냈다.
<위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만든 복제품. 사진 모습은 뒷면이다.
휴대용 크기였음을 알 수 있다. 외부 다이얼이 왼쪽 측면에 보인다. 사진: Taboodata.com>
<가장 최근 복원 모델의 기어배치. 우측이 장치의 위쪽임. 첫번째 사진 참조 하실 것>
우측 큰 바늘 – 메톤 주기 다이얼,
우측 중간 바늘 – 올림픽개최 주기 다이얼,
우측 작은 바늘 – 캘리퍼스 주기 다이얼,
좌측 큰 바늘 – 사로스 주기 다이얼,
좌측 중간 바늘 – 엑셀리그모스 주기 다이얼>
Michael Wright 는 영국 Imperial 대학 교수인데, 1997년에 더욱 정밀한 X-ray 장치로 조사해서 Price 연구 결과
만들어진 복제품이 가진 결함들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전까지 미궁에 빠져있던 5행성 운행을 표시하는 기어 장치의 비밀을 벗겨내는데 성공했고, 메톤, 캘리퍼스, 사로스, 엑셀리그모스 주기의 관련성을 밝혀냈다. 2006년이
이르러서 드디어 Michael Wright 는 이 장치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발표한다. 2007년 3월6일에 그는 그가
연구한 결과로 만든 복제품을 그리이스 국립 연구재단에 기증했다.
한편 2006년에 <Nature>지는 별도의 고해상도 X-ray 로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기어 개수가 현재
까지 발견된 30개가 아니고 37개 였을 것이란 추정이다. 더욱이 5행성들의 “유” (Stationary) 시기도 예측되었다고
발표했고, 2010년에는 Babylonia 천문학 영향도 받았을 것이라는 논문도 게재되었다.
5. 명품 시계의 원조 Archimedes
i) 제작자에 대한 역사적 기록
이 장치를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연구소 AMRP (Antikythera Mechanism Research Project) 는 이것이 그리이스 Corinth 지역에서 만들어 졌으며 Archimedes 가 제작에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결론지었다.
실제로 로마 철학자, 정치가였던 Marcus Tullius Cicero (라틴어 키케로, 영어 시시로, BC 106~BC 43) 의 저서
<De Republica>에는 요즘의 Planetariun 이나, Orrery (태양계 모형) 같이 태양, 달 그리고 행성의 운행을 예측하는
2가지 기계장치가 나온다. 그 2가지 기계는 Archimedes 가 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로마의 Marcus Claudius Marcellus (마르셀루스) 장군이 BC 212년 Archimedes 가 살던 Syracuse 를 정복한 후에 로마로 가져왔다고 한다. Cicero의 글을 보면 이 장치와 작동 원리가 매우 유사하므로 같은 장치를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Cicero는
다른 글에서 그의 친구인 Posidonius 가 Archimedes 가 만든 것과 유사한 장치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이 장치는 로마시대 AD 4~5 세기 작가들인 Lactantius, Claudian, Proclus 등의 작품에도 일부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이보다 정교하지는 못해도 그 제작기술이 로마시대 이후 비잔틴 제국 및 이슬람 제국으로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AD 5~6 세기 비잔틴 제국에서 만들어진 해시계에 부착된 기어 달린 천문기계도 있다. AD 1000 년 경에는 비잔틴 제국 기계와 비슷한 장치가 Al-Biruni 라는 책에 묘사되어 있고, 13세기 천문 관측기구에도 기어장치가 설치된 것이 있다.
이 같은 기어 달린 장치들이 중세유럽을 거쳐 근대 기계시계 발전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최근에 어떤 유명 시계회사가 이 장치를 손목시계 형태로 만들어 팔고 있으나, 글쎄.... 몇 개나 팔렸는지 궁금하다.
판매수익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히 거액을 투자해 소형시계로 만든 이 회사 사주에게 공로패라도 하나 주고싶다.
<안티키테라 장치 손목시계 앞면> <손목시계 뒷면. 두 사진 모두 광고가 아님>
ii) 위대한 천재 Archimedes
Archimedes (아르키메데스, BC 287~BC 212) 는 그리이스 인으로서, 지금은 Italy 영토인 Sicily 섬에 있는 Syracuse (현재 지명은 Siracusa) 에서 태어나서 이것에서 주로 활동했다. 당시 이곳은 Magna Graecia 라고 불리던 그리이스 도시국가 들의 식민지의 일부로서, 남부 Italy 해안지역에 그리이스에서 제일 강국이던 4개 도시국가들이 건설한
식민지 도시국가 중 하나이다. Magna Graecia 는 영어로 Great Greece 라는 의미이다.
<Syracuse 위치 – Sicily 섬 남동쪽에 위치. 현재 지명은 Siracusa.
갈색 – Doria 식민지 / 보라색 – Ionia 식민지
회색 - Achaea 식민지 / 짙은 갈색 – 북서 그리이스 식민지>
<현재 Italy Sicily 섬 Siracusa 시에 있는 Archimedes 광장>
그의 부친도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였고, 청년시절에는 Egypt로 유학하여 Alexandria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Egypt
유학시절, 지금도 건설현장에서 많이 사용되는 <Archimedes’ Screw>를 고안해냈다. 그는 땅바닥에 막대기로 글자를 쓰거나 도형을 그리면서 연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Archimedes’ Screw>
Syracuse 왕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와 상의했다고 한다. 왕의 의뢰로 새로 만든 왕관의
금 순도를 측정한 후, 이를 발전시켜 <부력의 법칙>을 만들었고,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장소만 충분하다면, 지구도 들 수 있다 (Give me a place to stand on, and I will move the Earth) ”는 그의 말과 같이 배우는 <지렛대 원리>는 그의 Trade Mark 이다. 수학에선 <원의 면적>, <포물선 면적>, <구 (Sphere) 의 면적과 부피> 구하기 등 다양한
업적이 있다. 또한 그도 역사상 많은 천재 과학자 들처럼 왕의 부탁으로 <기중기> <투석기> 등 기발한 전쟁 무기도 많이 개발해 주었다.
로마의 Marcus Claudius Marcellus (마르셀루스) 장군은 BC 212년 Syracuse 를 침공하면서, 그가 평소 존경해왔던 Archimedes 는 절대 해치지 말도록 병사들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병사가 Archimedes 집에 쳐들어왔을 때 그는 땅에 막대기로 도형을 그리며 수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병사는 그가 Archimedes 인지 모르고 땅에 그린 도형들을 발로 뭉개면서 장군을 따르라고 명령했다. 그는 화가 나서 병사에게 꺼져 버리라고 소리치자 이에 격분한 병사는 그를 죽이고 말았다. 후에 이 소식을 들은 Marcellus 장군은 크게 비통해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고 기념비도
세워 주었다는 전설이…. 중요한 일은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는 단순한 원칙을 로마의 걸출한 장군이 모르고 있었던 같다. 아니면 그 때 화장실 갔었거나.
<BC 212년 위대한 천재 Archimedes 의 죽음>
제가 이 장치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서 가졌던 의문점은, 천문학적 주기나 계산법에 대한 것이 아니고 기계공학의 발전단계에 대한 것이다. 저는 이 분야도 전혀 아는 바가 없어 세부적 사항은 언급드릴 수가 없으나, 정말 Archimedes 가 혼자서 이 모든 기계장치를 설계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기어를 깎는 기술자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어장치를 설계해서 천문예측 기구를 만드는 일은 원의 면적이나 구의 부피 계산 공식을 만드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리라 여겨진다.
요점은 이 장치가 발전 단계로서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식 또는 과학의 진보에서 로또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모든 지식체계는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단계적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Archimedes 이전 시대에 이 장치의 모태가 된 유물이 있었는지 아직 찾지 못했다. 혹시 아시는 분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rchimedes 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갑자기 정교한 기계를 뚝딱 만들어낸 것 같다. 저는 정말 Archimedes 가 혼자서 발명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발견되지 않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대의 어떤 유사한 기계에서 영감을 받았느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발전단계가 무시된 것들은 가끔 만날 수 있는데,
안티키테라 장치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아래에 같이 칼럼 올려 드립니다.
(2) 단절된 고대지식 – 불가사의한 세계지도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와 인류를 놀라게 한 안티키테라 장치처럼,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중세의 불가사의한 지도들을 살펴본다. 비록 지도가 천문학과는 관련 없더라도, 고대인들 지식수준이 수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얼마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가에 대한 한가지 예로서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여기서 소개드리는 내용은 미국 대학교수 Charles Hutchins Hapgood 이 1966년에 저술한 책 <Maps of the Ancient Sea Kings> 을 근간으로 한 것이다. (Chilton Books, Philadelphia & New York / 개정판 1979 Turns Books, London). 그는 Harvard 대학 졸업 후 미국의 Keene State 대학 교수로 재직 중에 이 책을 발표했는데, 이 책 출간
이후 정통파 학자들의 많은 공격을 받아 학계의 이단아가 되었다. 또한 1995년에 언론인 Graham Hancock 이 여러 고대문명의 의문점들을 기존 학설과 다른 각도에서 연구한 <Fingerprints of the Gods - 우리말 번역본 “신의 지문, 1996”>을 출판해 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Hancock 의 책은 최근 Hollywood 영화 <BC 10,000> 및 <2012> 제작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Charles Hapgood 의 연구는 정통파 학계에선 인정되지 않는 엄청 튀는 발상이며 황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1982년 이미 고인이 되었고 (1904~1982), 지금은 책 쓰는 저술가 이외에는 그의 가설을 연구하는 학자도 없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새로운 발상이 새로운 시대를 창조해 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면서 읽어 주시기
바란다.
1. Piri Reis 의 대서양지도 – 1513년
<Piri Reis의 지도 – 1513년 제작>
Piri Reis (피리 레이스) 는 본명이 <Hadji Ahmed Muhiddin Piri , 1465 (혹은 1470) ~ 1554 (혹은 1555)> 인데, Ottoman 제국 (오스만 투르크) 의 해군제독으로 16세기 중반 많은 해전에서 활약한 당대의 영웅이다. 다른 많은
해군 사령관들처럼 그도 지도 및 항해술에 대한 훌륭한 저술을 남겼다.
이 지도는 Piri Reis 가 이 지역을 직접 탐사 및 측량 해서 그린 것이 아니고, 그가 만든 1513년 만든 지도에 “고대의 지도를 참조해서 그린 것” 이라고 직접 주석을 달아 놓았다. 아마도 당시 콘스탄티노플 제국 도서관에서 고대 지도를 베꼈다고 추정된다. 이 지도는 콘스탄티노플 왕궁도서관에서 1929년 발견되었다.
그런데 위의 지도가 어디를 나타내는지 보이시나요 ? 우측 상단에 스페인이 조금 보이고 그 아래가 아프리카 서쪽
돌출부이다. 중간은 대서양이고, 좌측은 중남미 해안선이다. 이상한 모양의 지도가 현대의 지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래 그림 보시지요.
<Piri Reis 지도와 현대 지도의 위치 비교>
우측은 미국 공군이 사용하는 <투시도법> 지도로서 Egypt Cairo를 중심으로 한 지도이다. 각각의 번호는 각 지역의 대응 위치를 표시한다. Piri Reis 지도의 불가사의한 점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그가 베낀 고대의 원본 지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결과, BC 4세기 이전 또는 그 이전 지도들을
모사한 것이라고 Hapgood 은 주장한다. 또한 고대의 지도 이외에도 콜럼버스 등 탐험가들의 기존 자료들도 참조했을 것이다.
2) 빨간색 점 4번, 5번은 남극대륙을 표시하는데, 그 남극의 모양은 지금의 <1.6 km 두께 얼음에 덮인 남극대륙> 이 아니고 남극 얼음 아래의 땅 모양과 일치한다. 이는 미국공군 기술비행대대 (SAC) 지도제작 책임자 해롤드 올메이어 대령 이 1960년 7월 6일 문서로 공식확인 했다. 지도에 보이는 남극대륙 부분은 <Queen Maud Land> 지역의 얼음 밑의 땅 지형이다. 아래에 남극대륙 얼음 아래 지형도 올리므로 비교해 보십시오.
3) 남극대륙은 그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해안이 탐사되었다고 추정되나, 공식적으론 1818년 발견되었다. 남극대륙은 BC 13,000~ BC 4,000 년 동안에는 얼음에 덮여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로 밝혀졌다. Hapgood은 얼음 아래 남극대륙 모양이 지도에 그려진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각이동설>이란 가설을 제시했다. 이것은 <대륙이동설>과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대륙 전체가 이동하는 것인데 반해서, 전자는 껍질인 지각만 움직이는 것이다.
요점은 남극대륙이 BC 13,000~ BC 4,000 년 동안에는 지금 위치보다 3,200 km 북쪽에 있어서 기온이 따뜻해서 얼지 않았다가, BC 4,000년경 지각이동으로 지금 위치로 이동되고 얼음으로 덮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편 북반구에선 BC 10,000년경에 빙하가 녹기 시작해서 북반구 기온이 상승하고, 해수면이 높아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여간 <지각이동설>은 Albert Einstein 도 찬성했는데, Einstein은 Hapgood 이 1953년 출판한
<Earth’s Shifting Crust, 1953 초판, 1958 개정판. Pantheon Books, New York> 라는 책에 서문을 써주면서 Hapgood의 이론을 적극 지지했다. Albert Einstein 이 지구물리학에도 관심 있었나 보다. 제가 학생 때 Einstein의 몇 가지 저술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는 말년에 과학 뿐만 아니라 철학, 인류학 등 인문사회학은 물론, 과학의 사회기여 등에 대해 많은 글들을 남긴 것을 알게 되었다.
4) 이 지도는 <경도> 가 정확하고 지도 작성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은 <투시도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구의 위도는 측정하기 어렵지 않으나, 정확한 경도를 측정기란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고 한다. 경도 측정 기계인 크로노미터는 1761년에 John Harrison (영국) 이 발명했고, 그 기술은 1776년에 공개된다. 이를 사용해서 James Cook 선장은 그의 세번째 항해인 1778년부터 정밀한 태평양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5) 그의 남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지도들을 보면, 당시 존재도 모르던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강의
발원지도 나타난다. 더욱이 아마존 강은 두개나 그려져 있다 아마도 서로 다른 두개의 원본 지도를 베낀 것 같다.
또한 브라질 해안 동쪽 대서양 상에 지금은 없는 섬도 그려져 있는데, 이 위치에는 지금은 암초 (세인트 피터 엔드 폴) 가 존재한다. 아마도 원본 지도가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았던 빙하시대 막바지에 그려졌을 지도 모른다.
위의 몇가지 사실로 추정해 보면, Piri Reis 가 보고 베꼈다는 원본 <고대 지도> 는 당시 지식수준을 한참 뛰어 넘는 수준이었겠으나 현재로선 증명할 길이 없으므로 <연결고리 부재>란 도장 찍을 수 밖에 없는 파일이다.
2. Oronce Fine 의 세계지도– 1531년
<Oronce Fine 의 세계지도- 1531년>
<Oronce Fine (오론스 피네) 1494~1555)> 는 프랑스의 수학자, 지리학자이다. 이름을 라틴어로 써서 Orontius Finnaeus (오론티우스 피나에우스)로 읽기도 한다.
지도 우측 중앙 섬 같은 것이 남극대륙이다. Terra Avstralis (Incognito) 표시는 남쪽에 있는 미지의 땅 의미인데,
위치로 보아 호주가 아니고 남극대륙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한다. Hapgood은 MIT 공과대학의 Richard Strachen
교수와 이 지도를 공동연구 했는데, 아래의 결론을 발표했다.
1) 이 지도는 그 이전 시대의 몇 개 원본지도를 베껴서 모사한 것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남극대륙 해안 및 내륙 탐험 기록은 없다.
2) 지도에 보이는 남극대륙은 얼음 아래의 지형과 유사 한 것처럼 보인다. 로스해 및 해안은 현재의 빙하 얼음이
보이지 않고, 내륙 얼음 아래 있던 강의 궤적과 일치하는 강 표시가 되어 있다. 1949년에 남극조사단이 Core Tube를 이용해 얼음아래 강의 존재를 확인했다. 위에서 언급 드린대로 얼음 아래 지형은 BC 4,000 년 이전의 모습이다.
아래에 현재의 남극대륙과 과거 얼음 아래 땅의 모습 사진을 비교해 보십시오.
<남극대륙 – 현재 얼음에 덮여 있는 지형>
<남극대륙 – 얼음 밑의 땅 지형>
3. Mercator 의 세계 지도 – 1538년 및 1569년
<Mercator 의 세계지도- 1538년>
<Gerardus Mercator (1512~1594)>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내의 네덜란드로 불리던 지역 (현재는 프랑스 영토) 출신 지리학자이다.
1) 위의 지도는 알아보시기 힘들지만, 우측 섬 같은 것이 Oronce Fine 지도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한 남극대륙이다. 역시 이 지도도 그 이전 시대의 지도를 베낀 것으로, 얼음 아래 남극지형 을 보여준다고 한다.
2) Mercator 는 고대 자료를 열심히 수집했다고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고, 51세 때인 1563년에 피라미드 보러
이집트까지 여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고대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연구결과, Mercator 는 Oronce Fine가 보고 베낀 원본 고대 지도와는 또 다른 고대 지도를 보고 모사했다는 결론이다. 더욱이 이 지도에는 당시 아직 발명되지도 않은 경도측정 장치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지도는 그가 31년 후인 1569년에 만든 지도이다.
<Mercator 의 세계지도- 1569년>
지도 아래쪽이 남극대륙인데, 아직 얼음으로 덮이지 않는 지형이 상세히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남아메리카 지도는 그가 만든 1538년 지도에 비해 정밀도가 크게 떨어진다. 그 원인은 1538년 지도는 고대 원본 지도를 거의 모두 베꼈지만, 1569년 지도는 스페인 탐험가의 측량을 많이 반영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4. Buache 의 남극대륙 지도 – 1737 년
<Buache 의 남극대륙 지도 – 1737 년>
Phillipe Buache 는 18세기 프랑스 지리학자이다.
이 지도도 역시 얼음이 존재하지 않던 남극대륙 모양 과 유사하다. 이런 지형은 1958년 실시한 정밀한 지진탐사
방법으로 얼음아래 지형을 조사해서 밝혀졌다. 1737년에는 남극이 탐사되지 않은 때였다. 만일 그가 남극을 직접
탐사하며 측량했다고 해도 얼음 두께 1.6 km 아래의 땅 모양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5. Hadji Ahmed 세계지도– 1559년
<Hadji Ahmed 지도 원본 – 1559 년> <Hadji Ahmed 1559년 지도를 잘 보이게 다시 그린 것>
위 그림에선 잘 보이지 않으나, 이 지도엔 지금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사이 베링해협인 바다가 띠 모양의 육지로
연결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상태는 지구 북반구가 아직 빙하에 많이 덮여있어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았던 BC 10,000년 이전의 모습 이라고 한다.
하여간 남극대륙을 표시한 Piri Reis, Oronce Fine, Mercator 및 Buache 의 4개 지도를 보면, 남극대륙이 수천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탐사되어, 얼음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연대별로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 기간은 남극대륙에 얼음이 전혀 없던 BC 13,000 년부터 얼음이 뒤덮기 시작한 BC 4,000 년 까지이다. Buache 지도의 원본 지도는 BC 13,000 년경, 얼음이 없던 때이고, Oronce Fine 의 원본은 그 이후 이고, Mercator 와 Piri Reis 가 참조한 원본은 BC 4,000 년경 얼음이 대륙을 덮어갈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안타까운 점은 그들이 참조했던 원본지도들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하기야 그들이 베낀 원본지도가 공개되면,
베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자기가 만든 지도의 가치가 없어지므로 당연히 당시에는 지도 제작자가 잘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원본 지도가 발견된다면 인류 진화 및 문명에 대한 기초를 흔드는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다. Diego Cuoghi 를 비롯한 정통파 학자들 주장을 보면 예전 지도들은 제작자가 직접 탐사도 하지 않은 채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지구가 무게균형 맞으려면 남쪽에 적당한 크기의 대륙이 있어야 한다는 고대의 이론에 따라 제작자 구미에 맞게 그려지거나, 또는 당시에 패권 경쟁하던 국가들이 위신을 살리기 위해 임의로 제작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며 위의 이론을 사이비 종교 같은 개념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미 말씀 드린대로 “아직”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Charles Hapgood 의 가설이 진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현재로선 진실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지구 어느 구석에서 BC 13,000 ~ BC 4,000 년 기간의 어떤 시대에 출중한 항해술, 내륙 탐사능력, 수학 및 경위도 측정기술 등을 모두 갖춘 문명인이
살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어 인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날을 기대해본다.
II. Not Essential But Beneficial
G = 6.67384 x 10−11 N m2 / kg 2
G = 6.67384 x 10−11 m3 kg -1 sec -2
(1) 고전 물리학의 고전 Principia
위의 수치는 중력상수 (Gravitational Constant) 를 표시한다. 물리학에선 보통 중력상수를 영어 알파벳 대문자 G 로 표시하고, 소문자 g 는 중력가속도를 나타내는데 사용한다. 그런데 g는 무게 단위 gram 으로도 사용하므로 헷갈리기 쉽다. 지난호 Serial No 9 에서 살펴본 우주상수는 그리이스어 알파벳 Lamde λ 의 대문자 Λ 로 표시하고 허블상수는 영어 대문자 H 에다가 골 아프게도 반드시 0 을 H 의 아래쪽에 붙여서 H0 로 쓴다. 지난호 칼럼 쓸 때는 키보드에 그리이스 문자가 없을 뿐더러, H0 같은 문자는 쉽게 입력할 수도 없어 좀 불편했으나, 이번에는 단순한 G 라서 다행이다.
물리학 가문에서 <상수> 돌림자 쓰는 같은 항렬 (行列) 형제들 중 대표적 3형제는 중력상수, 우주상수, 허블상수들인데 중력상수는 이 중에서 가장 맏형으로서, 출생 년도가 “실제로는” 1666년 이고 “공식적으론” 1687년 이다. 이 같은 연도가 차이는 우리가 실제 출생한 연도와 부모님께서 동사무소에 출생신고 하신 연도가 달라서 실제 나이와 호적상 나이가 다른 것과 같다.
중력상수는 만유인력 상수와 같은 말이며, 잘 아시는 것처럼 Issac Newton (아이작 뉴턴 1642~1727) 이 최초로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다. 이 개념은 1687년 7월5일 출간한 그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에서 처음 “공식적” 으로 발표 되었다.
인류 과학발전에 워낙 지대한 영향을 준 책이므로 생긴 모습도 보고, 책의 내용도 간단히 알아보고 지나간다. 아래
사진은 Newton 이 직접 소장하고 있던 초판 원본이다. 나중에 개정판 발행을 위해서 그가 직접 손으로 보완할 사항에 대해 주석을 달아 놓았다. 사진 보시면 그가 메모해 놓은 글자들이 보인다.
<Newton 이 소장하고 있던 Principia 초판>
이 책은 3권 (Book 1~3) 한 세트로 되어있다. 내용도 어려운데다가, 성직자나 학자들만 사용하던 죽은 언어 라틴어로 되어있어 당시에는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고 전해진다.
1 권 (Book 1) 에는 고전물리학 기본인 관성, 가속도, 작용반작용 법칙이 설명되어있다. 이것들은 나중에 Newton의 운동 3법칙으로 불리게 된다. 2권 (Book 2) 에선 1 권의 일부 내용을 따로 상세히 설명한다. 무게추가 흔들릴 때의
공기 저항력, 액체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의 저항력 및 소리 속도 측정 등의 내용이다. 3권 (Book 3) 에 이르러 비로소 천체 물리학 용어들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만유인력을 비롯, 케플러 이론, 지구와 달, 혜성의 공전궤도 등이 설명되어 있다. 참고로 Book 1~3 의 소제목 (Subtitle) 은 아래와 같다.
Book 1 De Motu Corporum (영어 : On the Motion of the Bodies)
Book 2 1권의 연장 1권의 연장
Book 3 De Mundi Systemate (영어 : On the System of the World)
<1726년 출간된 3판>
<책의 내부 내용-출간년도 정보 없음>
그러나 Newton 은 이 책에서 만유인력 개념만 설명했을 뿐, 중력상수를 계산해 놓지는 않았다. 그 대강의 수치는 Newton 이 사망한지 71년이나 지난 1798 년에 같은 영국인 물리학자 Henry Cavendish (헨리 캐번디쉬 1731~1810) 의 실험결과를 기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Cavendish 도 사실은 중력상수를 구하려던 것은 아니고 지구밀도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를 나중에 다른 학자들이 정리하면서 중력상수를 알게 되었다. 아래에서 다시 자세히
살펴본다.
(2) 흑사병 없었으면 Newton의 만유인력도 없었다
한편 Newton은 23세 때인 1665년 Trinity College, Cambridge 를 졸업했다. 그런데 한해 전인 1664년부터 1666년 까지 2년 동안 영국에서는 흑사병 (페스트) 이 창궐해서 나라가 어수선할 때였다. 전염병으로 대학은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고, Newton 은 할 수 없이 졸업직후인 1665년에 Lincolnshire 주에 있는 Woolsthorpe 라는 이름의 고향집
농장으로 돌아가 다시 대학이 문을 여는 1667년까지 2년 동안 어머니가 해 주시는 따뜻한 밥 먹으며 그가 관심 있는 분야를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1664~1666년의 영국 흑사병 묘사한 것>
<Newton 의 고향 Lincolnshire 주. 이곳에 Woolsthorpe 라는 그의 농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만유인력을 생각해 냈다고 전해짐>
여기까지는 사실인데, 그가 1666년 어느 날 고향집 정원 사과나무 아래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생각해 냈다는 일화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논란이 있다. 그러나 Newton의 조카의 남편이면서 그의 조수로 일했던 John Conduitt 는 Newton 이 정원을 거닐면서 생각해 냈다고 기록해 놓았다. 또한 그의 친구였던 William Stukeley 는 Newton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726년 4월15일에 Kensington 에서 그와 대화한 내용을 1752년에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는 Newton 이 사과에 머리를 얻어 맞고 번뜩 생각해냈다는 말은 없으나, Newton 이 만유인력 개념을 설명할 때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현상으로 비유해서 말했다고 되어있다.
한편 프랑스 문학자 Voltaire 는 1727 년 발간한 저서 <Epic Poetry> 에서 Newton 이 정원을 산책하다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생각해 냈다고 기술해 놓았다. 당시에 국제적으로 저명한 인물이라 이후에 그의 기록이 세상에 많이 알려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정말로 사과에 얻어 맞고 번뜩 생각해냈는지는 의문이지만, Newton 이 만유인력 개념을 고안할 당시,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이 어떤 방법으로든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아래 사진은 Newton 이 영감을 받은 그 사과나무의 “후손” 이라며 Trinity College, Cambridge 대학이 구내에 옮겨 심어 놓은 사과나무이다. 그런데, 비료도 주지 않는지, 삐쩍 마르고 키도 크지 못한 나무 모양이 영 처량해 보인다. 이 대학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 유품이 워낙 많으므로 우리가 관공서에서 자주 듣는 “예산과 인력 부족” 때문에 그런지도…
<지금의 Trinity College, Cambridge 대학 구내에 있는 Newton 의 사과나무 “후손”> .
(3) 큰 물에서만 힘 쓰는 중력
중력은 만유인력과 같은 의미이며 여기서는 두 글자라 부르기 편한 중력이란 말을 사용한다. 중력은 우주에 존재하는 4가지 힘인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 그리고 중력 중에서 가장 약한 힘이다. 약하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시면 조그만 자석의 자기력이 그 자석보다 더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며 중력을 이겨내는 것을 보시면 짐작 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손으로 가지고 노는 범위 말고, 우주적인 규모로 생각한다면 다른 3가지 힘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두가지 핵력 모두 원자핵을 벗어나면 작용하지 못하며, 전자기력은 대부분 물체가 (+) 전하와 (–) 전하를 동일하게 보유하고 있어 두 전하의 힘이 물체 내부에서 상쇄되므로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력은 언제나 다른 물체를 끌어 당기고 있으므로, 우주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별이나 행성을 구형 (공 모양) 으로 만들고,
행성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별 주위에 붙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별들이 제 맘대로 은하 밖으로 쏘다니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다.
두 물체간 서로 당기는 힘 F (Attractive Force) 이 중력 또는 만유인력 인데, 이는 두 물체 질량 (m1 m2) 에 비례하고, 두 물체간 거리 r 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두 힘 F1 과 F2는 같은 크기이다. 이를 공식으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으며 여기서 G 가 제목에서 표시 드린 중력상수이다.
2007년 7월에 <Science>에 실린 논문의 수치는 약 6.693 이었다. 그러나 2010년 7월에 <The Committee on Data for Science and Technology> 및 <The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두 기관이 새로 측정된 수치를 발표했으며, 이 수치가 지금까지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치라고 한다. 칼럼 제목의 수치를 옮겨 쓰면 아래와 같다. 그런데 6.67384 x 10−11 이 과연 얼마나 되는 숫자인지 감이 잘 안오실테니 이를 풀어 써본다. 6 앞에 0 이 전부 11개나 붙고, 맨 앞의 0 뒤에는 소수점 붙어야 하므로 0.0000000000667384 가 될 것이다. 중력이 다른 힘에 비해 얼마나 약한 힘인지 잘 보여준다.
G = 6.67384 x 10−11 N m2 / kg 2 또는
G = 6.67384 x 10−11 m3 kg -1 sec -2
위의 두가지 수치는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들이며, 사용하는 단위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 가능하다. 참고로 첫번째 수치에서 N은 Newton 이란 힘의 단위이다. 이는 질량 1kg 인 물체를 1m/ sec 2 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따라서 단위는 Kg / m/ sec 2 로 사용한다. 첫번째 수치에서 N을 Kg / m/ sec 2 으로 바꾸면 두번째 수치가 된다.
(4) Cavendish가 잡은 새우로 고래를 건지다
Henry Cavendish 는 영국인이지만 1731년 그의 부모가 잠시 프랑스 Nice 에 거주할 당시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출생 이후에는 영국에서 살았다. 그의 부모 모두 공작 (Duke) 귀족에다가 재산도 상당해서 과학연구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공작은 예를 들어 왕의 형제 같은 서열이며, 왕의 유고시 왕으로 취임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귀족이므로, 그의 부모 모두가 당시에 얼마나 높은 지위와 재산을 보유했는지 짐작이 된다. 그는 귀족에다 억만장자였으나, 황태자 클럽이나 만들어 쓸데없는 일하고 다니지 않고 많은 재산을 과학 실험에 투자하고 직접 연구했다.
머리도 식힐 겸, 유럽의 중세초기에 정립된 귀족신분에 대해 몇 말씀 드린다. 당시 확립된 서열은 아래와 같다.
우리말 번역은 근대 초기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지위가 높은 것부터 순서부터 열거한다. 영어의
– ess 가 붙은 것은 부인을 의미한다. 귀족신분제도 시초는 800~900년대경 프랑크 왕국의 관직 이름이었는데
중앙집권적 봉건제도가 유럽에 확산되면서 더욱 세분화되어 정착되었다고 한다. .
공작 (Duke/Duchess) – 후작 (Marquis, Marquess/Marchioness) –
백작 (Count/Countess) – 자작 (Viscount/Viscountess) - 남작 (Baron/Baroness)
영화에서 멋있게 보이는 기사 (Knight) 는 위의 귀족 계급에 포함되지 않는다. 세력이 작은 지방 영주를 호칭하기도 하지만, 왕으로부터 정식 작위를 받은 귀족의 사설 경호대 혹은 사설 군대의 지휘관이다. 물론 왕이 직접 임명하기도 하고, 왕의 경호대를 호칭하는 경우도 있다. 원탁의 기사처럼.
귀족 얘기 나온 김에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의 혈통주의에 대한 말씀도 추가로 드릴까 한다. 요즘 같은 국제적 민주
시대에 쓸데없이 구시대적 혈통 운운이라고 하시겠지만, 아직도 서양 사회구조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혈통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 산책 겸해서 살펴본다. 프랑스는 혁명 이후 공화제를 채택했으나, 영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아직도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도 군주제 관련 용어들이 많이 보인다. 정치 제도에서도 예전 제국주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에서<헌법상 국가 최고수장>은 아직도 영국 여왕이다. 또한 비록 총리가 내치 및 국제외교를 맡고는 있으나, 영국은 <총독>을 별도로 파견해서 양국간 외교사안을 다루게 한다. 지금의 영국 왕실 조상이 독일인이라는 얘기는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게 된 내력 좀
살펴보고, 보다 더 위로 올라가서 영국 왕가가 어느 민족의 혈통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겠다.
600년대 이후로 노르웨이 지역에 살던 바이킹족이 지금의 덴마크, 프랑스, 영국 등 서유렵을 침략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노르만족 이라 부른다. 이 노르만족이 911년 프랑크 왕국 북부 노르만디 지역을 침공하자 프랑크 왕은 그
지역을 노르만족에게 내주면서 노르만디 공국이라 부르고 자치를 허용했다. 한편 노르웨이에서 덴마크로 이주한 바이킹족을 별도로 데인족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게르만족 이동시기에 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주류를 이루던 앵글로색슨족 등 영국 토착민이 통치하던 영국을 1015년 전후로 완전히 정복하고 데인 왕조를 세운다. 영국이 덴마크 출신 바이킹이 지배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1066년 데인 왕조 마지막 왕이 죽을 때 그의 자손이 없자, 그는 왕가의 혈통이 아닌 의형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이를 도버 해협 건너서 지켜보던 위에서 말씀드린 노르만디 공국 지배자 기욤이 영국 왕이 되고 싶어서, 자기는 노르만족이며 데인 왕조의 먼 친척 된다고 주장하며 영국을 침공해 싹쓸이 하고 스스로 왕에 취임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William 1 세 이다. 이 사건을 <노르만의 영국정복>이라 하고 William 1세 자손들을 노르만 왕조
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노르웨이 및 덴마크 출신 바이킹들이 덴마크, 영국 및 프랑스 북부를 지배하게 되어 서유럽 3개 국가가 형제국 이 되어 버렸다.
당시 노르만디 공국은 혈통만 바이킹이고, 문화는 완전히 프랑크 왕국에 동화되어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관직제도 등 모두 프랑스 식이었다. 당연히 William 1세 및 그 지배계층도 프랑스어만 쓸 줄 알고 영어는 사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영국에선 한동안 프랑스어가 공용어가 되고, 성직자, 학자들은 라틴어를 사용했으며 영어는 평민들만 사용하게 된다. 이 사람은 정치제도도 프랑크 왕국에서 가져와 봉건제도를 시행했으나, 자기 권력은 나눠주기 싫어해서 소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 를 만들어냈다. 이런 체제 아래에서 귀족 직위도 세분화되어 그 권리와 책임소재가
명확하게 정착된다.
이처럼 왕이 죽기 전에 물려준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고 “같은 핏줄 만이 왕이 될 수 있다” 라는 전통을 William 1세가 확립한 이후, 왕이 되기 위한 제일 중요한 조건은 “능력”이 아니고 “혈통”이 된 것이다. 따라서 왕이 생존할 때 그 왕의 피가 몇 % 섞여 있는가에 따라 차기 왕위 계승 서열을 미리 만들어 두는데, 해외에 사는 사람 포함해서 약 100 위 정도까지 만들어 놓기 시작한다.
지금의 영국 왕가도 사실은 독일에서 영입된 인물부터 시작되었다. Stuart 왕가 마지막 여왕인 Anne 여왕 자녀들이 모두 어릴 때 사망해서 말년에 왕위을 물려줄 사람이 없자 레임덕 현상이 일어나고, 혈통이 앤 여왕과 가까워 왕위 계승 가능성 있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옮겨가기 시작해 나라가 어수선해진다. 참고로, 여기의 Anne 여왕은 재위기간이 1702~1714년이며, 예전의 유명한 영화 <천일의 앤 – Anne of the Thousand Days> 에 나오는 Anne 왕비와는
다른 인물이다. 이 영화의 Anne 은 본명이 Anne Boleyn 인데, Tudor왕조의 Henry 8 세 (재위기간 1509~1547)
시대 두번째 왕비로서 Anne 여왕보다 2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폐비윤씨-연산군 드라마의 영국판 버전 비슷하므로 기억나시도록 잠시 이 사람의 비극적 인생을 소개 드린다. 영화로도 잘 알려진 Henry 8 세는 첫 번째 왕비에게서 아들이 없자, 왕비의 시녀인 Anne Boleyn 과 눈이 맞아 결혼하려고 첫번째 왕비와의 이혼을 교황에게 신청했으나 거절당한다. 성질이 불 같은 Henry 8세는 교황을 무시하고 결혼식 올린 다음, 카톨릭 교회에서 탈퇴한 후 영국만의 자체 교회인 <영국 국교>를 창설하고 자기가 영국내의 교황인 <수장>에 스스로 취임한다. 여기까지는 종교와 정치적 압박에 굴하지 않고 사랑만을 위해 사는 멋있는 남자인 듯 보인다. 그러나 Anne 도 딸 한 명 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하자, 여러 누명을 씌워서 결국 두 번째 왕비인 Anne 을 참수형으로 처형시켜 버리는 냉혈한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그러나 Anne 이 낳은 딸은 Henry 8 세 사후 즉위한 Merry 1세 여왕이 얼마 못가서 죽자, 젊은 나이에 여왕으로 등극하여 억울하게 처형당한 어머니에게 보답을 하게 되는데, 이 딸이 바로 Elizabeth 1 세이다. 이 시대에 비로소 영국이 유럽의 최강국이 되는 초석을 다진 황금기가 되었으므로 지금도 Elizabeth 1 세는 위대한 여왕으로 존경 받고 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기 바란다. 지금의 영국여왕 Elizabeth 의 정식 왕호는 Elizabeth 2세 이지만, 이 사람은 같은 민족, 머나먼 친척이란 것 빼고는 Elizabeth 1세와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조선시대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은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하고 폭군으로 남은 데 반해서, 같은 비극적 운명이던 Anne 왕비의 딸인 Elizabeth 1 세는 영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들의 상반된 인생이 너무도 대비된다. 자주 드리는 말씀, 역시 <일체유심조>…
하여간 Anne 여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영국은 독일에서 이전의 영국 왕이었던 James 1세의 외증손자를 독일에서 데려와 왕으로 세우고 George 1세 라 부른다. 원래 이 사람은 1701년에 제정된 <왕위 계승법>이란 것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왕위계승 서열 52위 였다. 그러나 최상위 서열인 James Edward 라는 사람이 카톨릭교도였기 때문에 반드시 기독교도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왕실의 입장 때문에 왕위 계승법이란 것을 미리 만들어 기독교도인 이 사람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사전에 조치해 놓은 것이다.
George 1 세의 혈통을 보면 아래와 같다.
James 1 세 (Stuart 왕조 창시자) à 공주 Elizabeth à 딸 Sofia à 아들 George 1 세
그런데 Sofia는 독일로 시집갔기 때문에 아들 George 1 세는 당시 독일국민 이었다. 한편 그의 외증조부 James 1세는 Stuart 왕조를 시작한 인물로서, 위에서 언급한 노르만 왕조 시대의 귀족 자손이라 George 1세도 역시 노르만족 혈통이 섞여있다. James 1세부터 내려 받은 혈통으로 말하면 (1/2) 3 이므로 12.5 % 이다.
우여곡절 끝에 1714년 George 1 부터 시작된 왕조를 그가 살던 독일의 성 (城) 이름을 따서 Hanover 왕조 로 부른다. George 1세가 왕으로 취임한 이후엔 독일 출신 인물이 영국을 통치하게 되어 영국, 독일이 사실상의 형제 국가가 되고 말았다. 이 George 1 세는 영국 왕으로 취임했을 때 나이가 54세라 의욕도 없고, 독일에서 자라 영어도 못하므로 정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핑계거리만 생기면 자기 집인 독일 Hanover 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 의회는 급한대로 자기들이 권력을 잡아 국정을 볼 수 있도록 내각책임제란 기발한 방법을 개발해냈는데,
그 이후 이 내각책임제가 영국정치의 전통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영국이 독일과 전쟁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Hanover 란 독일의 성 (城) 이름을 왕조이름으로 쓰는 것에 대한 국민 여론이 좋지 않아 1917년 George 5세는 Windsor 왕조 라고 개칭한다. 이후 영국 왕가는 Windsor 왕조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의 Elizabeth 여왕도 마찬가지이다. Windsor 란 이름은 London 외곽에 있는 영국왕실의 별궁이름이다. 이 궁전은 위에서 언급드린 William 1 세가 처음 건축하기 시작한 것으로, 영국 역사를 통틀어 제일 위대한 여왕으로 존경 받는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한 많은 왕들의 무덤이 있어, 영국인들에겐 성소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참고로 현재의 왕실 집무실 및 주거지는 London 광역시 Westminster 시에 있는 Buckingham (버킹엄) 궁이다.
따라서 지금의 Windsor 왕조의 조상은 독일 국적 노르만족 (George 1세) 이었고, 더 올라가면 프랑스 국적 노르만족 (William 1 세, James 1세) 이며, 덴마크 국적 데인족 (데인왕조) 과는 먼 친척지간이 된다. 달리 말씀 드리면 지금
영국 왕실은 선사시대 이후 영국 땅에 거주해 왔던 켈트족이나, 게르만족이 조상인 앵글로색슨족 등 영국 토착민
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Elizabeth 여왕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족보에 관련된 얘기라던가.
위에서 말씀드린 사항은 오직 영국을 중심으로 한 왕실의 족보만 살펴 본 것이고, 역사 자체를 말씀드린 것은 아니다. 긴 안목에서 본다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역시 국민들 (또는 민중, 대중) 의 보이지 않는 힘일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일으키는 전쟁 및 베일에 감춰진 음모와 암투가 변화무쌍 하기 때문에 소설이나 사극,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어왔다고 생각한다. 유럽 왕실은 노르만족 혈통을 유지하려고 오랜 세월 동안 같은 노르만족 귀족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영국만 보더라도 근대 이후로 앵글로색슨 계통 평민과의 결혼이 가끔 생기고, 이 때마다
큰 사회적 이슈가 되어왔다. 따라서 점점 그 혈통이란 것도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왕족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여간 서양, 특히 유럽에선 이 “혈통” 개념이 아직도 사회구조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소위 평민, 귀족의 구분을 대부분 국민이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미국도 말은 모두가 평등한 민주국가라고 떠들지만, 그들 나름대로 소위 ”가문” 은 마음 깊은 곳에 자부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영국 작가가 쓴 소설 <해리 포터> 에서는 순수혈통 마법사가 머글을 천시하는 갈등구조를 보여준다. 해리포터 어머니도 머글이지만 뛰어난 마법사로 설정해 놓아서
해리포터가 정의의 사도가 될 수 있는 “정통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금상첨화로 선 (善)을 대표하는 훌륭한 부모를 둔 자손으로, 고난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을 떠올리며 스스로 용기를 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 작가가 쓴
<다빈치 코드>도 혈통주의를 기반으로 하긴 마찬가지이다. 물론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므로 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혈통 문제는 어떤 사회구조를 기반으로 하는가에 따라 긍정적이 될 수도 있고 부정적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쥬” 라는 것을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사항들은 너무 개인적 의견이
되므로 여기서 줄이는 것이 나을 듯하다. 사족으로 말씀 드리면, 일본은 근대 문호개방 직후에 모방의 달인답게
그들의 원래 신분체계를 수정하면서 까지 서양 귀족체계를 따랐다. 우리나라는 일제시기 중간의 대한제국 시대에
일본의 압박이 있었겠으나, 결과적으론 일본을 흉내내서 관직에 따라 귀족신분을 주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사 중
씁쓸한 시대로 생각된다. 잠시 머리 식히려 산책 나왔다가 날 저물게 생겼다. 다른 길로 빠지면 항상 삼천포까지는
가야 끝나는 것 같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Cavendish 의 업적을 보면, 물리학은 일부이고 화학에서 더 많은 성과가 보인다. 그는 수소를
처음으로 발견 하고, Inflammable Air (가연성 공기) 라고 이름 붙였다. 또한 이미 알려져 있던 산소와 그가 발견한 수소가스를 전기로 연소시켜 물을 만들어내서 물이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진 것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는 지구의 밀도가 얼마나 되는 지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1797년부터 1798 년까지 1년 동안 지구밀도를 측정실험을 진행한다. 사실 그는 중력상수 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고, 오직 지구 밀도를 측정하는 것에만 목적이 있었다. 그의 실험
방법은 아래와 같다.
<그림 1 - Torsion Pendulum >
<그림 1> 과 같은 구조의 측정장치를 Torsion Pendulum 또는 Torsion Balance 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비틀림 추> 또는 <비틀림 저울> 인데, 매우 작은 힘을 측정하는데 사용된다.
1777 년 프랑스의 Charles Augstin de Coulomb 가 처음 발명했다고 하며, 1783 년경 영국의 John Michell 이 이와 별도로 독자적인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하여간 Cavendish 는 같은 영국인인 John Michell 이 만든 모델을 사용했다.
Torson Fiber 는 가느다란 금속선인데, 비틀리는 정도에 따른 힘의 변화를 미리 측정해 놓으면, 어느 정도 힘이 가해질 때 어느 정도 비틀리는지 알 수 있다. 막대기 양 끝에는 납으로 된 공을 달고 중간에는 거울을 달아 놓았다. 정렬된 상태에서 Laser 또는 빛을 거울로 비추면 센서 스크린 중앙으로 빛이 반사된다.
<그림 2 – 중력으로 인한 Torsion Pendulum 의 회전>
다음에는 위의 <그림 2> 처럼 두 개의 큰 납 (Lead) 으로 된 공을 작은 납 공에 가까이 접근 시키면 만유인력에 의해서 작은 공이 큰 공 쪽으로 회전하게 되고 이 미세한 움직임을 거울이 증폭해서 센서로 전달하게 된다. 회전된 각도와 미리 측정해둔 금속선의 비틀리는 힘을 이용해서 두 공에 작용하는 인력을 구하고, 지구 밀도를 구한다고 한다.
지구 밀도를 구하는 자세한 내용은 제가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그냥 지나갑니다.
실제 실험에선 대기의 온도와 공기흐름의 영향을 방지하기 위해 밀폐된 상자 안에서 실험을 진행한다. 참고로 당시 Cavendish 논문에 실린 그의 실험 방법을 아래에 같이 올려 드린다.
<Cavendish 논문에 실린 실험장치 구조도> <추 부분을 확대한 것>
이 같은 방법으로 1798년 Cavendish 가 구한 지구 평균밀도는 5.448 gram cm −3 이었다. 이 말은 지구 밀도가
1 입방 cm 당 5.448 gram 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지구 밀도를 중력상수와 연결시키려는 연구는 시도되지 않았다. 그의 실험 후 75년이 지난 1873년 이후에야 여러 학자들이 지구밀도를 이용해서 중력상수를 구하는 공식을 개발해 내기 시작하는데, 그 공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아래 공식 역시 제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내용이므로, 죄송하오나 생긴 모양만 보고 넘어갑니다.
<지구밀도를 이용해 중력상수 구하는 공식>
하여간 위의 공식으로 얻어진 중력상수 G = 6.74 x 10−11 m3 kg -1 sec -2 가 된다고 한다. 이는 2010년 측정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치인 6.67384 에 비교해서 약 1 % (0.9913 %)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엄청난 결과이다.
실제로는 Cavendish 가 중력상수를 측정한 것이 아니라 지구 밀도만 측정해 놓았고, 나중에 후대의 학자들이 별도로 공식을 개발해서 중력상수를 계산해 낸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중력상수의 최초 측정자가 Cavendish 인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Cavendish 가 잡아 놓은 새우를 미끼로 후대 학자들이 고래를 잡은 형국이지만, 그래도 그 새우가 없었으면 고래도 없었을 것이다.
III. Surprise & Mystery
색즉시공 공즉시색 – Twin Quasar
(1) 같이 출발한 빛, 도착은 417일 차이
몇 가족이 같이 자동차로 여행할 때, 출발은 같았으나 어떤 가족은 길을 잘못 들어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경우도 많이 생긴다. 그러면 어떤 한 별에서 동시에 나온 두 가지 빛 갈래가 지구에 도착하는 시점이 서로 달라질 수도 있을까 ? Twin Quasar 또는 Double Quasar 라는 별이 이 경우인데, 그것도 순간의 차이가 아니고 무려 1년 1개월이 넘는 417일 차이가 난다. 도대체 그 중의 한 빛은 오면서 어디를 쏘다니다 뒤늦게 지구 문을 두드리는 것인지 알아본다. 먼저 이 별 주변 밤하늘 사진부터 보시지요
<미국 Ruben Kier 작품 - NGC 3079 주변.
12 inch Astro-Physics Riccard-Honders Astrograph f/3.8,
CCD : Quantum Scientific Images (QSI) 583wsg CCD
LGRB Image with exposures of 100, 28, 36 and 28 minutes, respectively>
사진 가운데 보이는 은하가 NGC 3079 이며 그 오른쪽 아래 화살표 보시면 모래알 같은 두개 별이 나란히 보이는데, 이것이 Twin Quasar 또는 QSO 0957+561 A/B 로 불리는 Quasar 이다. 사진은 안정적 구도를 위해 실제 보이는
밤하늘 모습을 오른쪽으로 90도 회전한 것으로, 사진 위쪽이 동쪽이고, 오른쪽이 북쪽임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이 사진에선 구별이 쉽지 않으나, 화살표 부분은 두 개의 별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한 개의 별에서 나온 빛이
중력렌즈 (Gravitational Lens) 현상 때문에 우리 눈에 두 개로 보이는 것이다. NGC 3079 와는 10 분각 (Arcminutes) 떨어져 있다. 이미지 A와 B 사이의 거리는 천왕성 시직경 정도인 6초각 밖에 되지 않는다. QSO는 Quasi-Stellar Obejects 의 약자. 그러면 밤하늘 어느 부분을 찍은 것인지 성도를 살펴본다.
<큰곰자리 (Ursa Major)
적경 10/ 01/ 20.99 적위 + 55/ 53/ 56.5
거리 78억 광년 인시등급 A–16.7 / B-16.5>
위의 성도는 큰곰자리 북두칠성에서 국자부분만 확대한 것이다. 성도 왼쪽 사각형이 국자이고 델타별 δ 에서 왼쪽
으로 그려진 선이 국자 손잡이 부분이다. 국자 사각형 밑받침 부분 왼쪽은 <감마별 γ - Phad>이고 오른쪽은
<베타별 β – Merak> 인데, 이 두 별 간격 정도 북서쪽으로 가면 NGC 3079 가 보인다. 여기서 조금만 더 북서쪽으로 이동하면 이 Quasar 가 사는 곳이다. 지구로부터 거리는 무려 78억 광년. 태양의 현재 나이는 50억세 인데 이 별까지 거리는 78억 광년이므로 우리는 태양계가 형성되기 28억년 전에 나온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시간 노출 준 사진으로만 볼 수 있지만. 그러면 이 Quasar 가 좀 더 잘 보이는 사진을 올려 드린다.
<SDSS 사진 - QSO 0957+561 A/B 주변부>
위의 사진은 SDSS 가 찍은 것으로, 일반적 성도와 같은 방향인 위쪽이 북쪽, 왼쪽이 동쪽이다. 사진 중심에 보이는
작은 점 두 개가 QSO 0957+561 A/B이며 위쪽별이 A 이미지이고, 아래쪽이 B 이미지이다. 여기선 두 개 이미지가 조금 구별되어 보인다. SDSS는 Sloan Digital Sky Survey의 약자이다.
<SDSS 사진 확대 – QSO 0957+561 A/B.
사진 가운데 위쪽 별이 A 이미지이고, 아래쪽이 B 이미지>
(2) 60년간의 Einstein 인내력 테스트
이 Quasar는 중력렌즈 현상이 발견된 최초의 천체로 기록되어 있다. 1915년 발표된 Einstein 상대성이론에는 “거대한 질량은 그 주변공간을 왜곡시키므로 주변을 지나는 빛도 구부러질 수 있다” 라는 가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설은 상대성이론 발표 4년밖에 지나지 않은 1919년 개기일식 때 물리학적으로 증명된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태양의
뒤편에 위치한 황소자리 (Taurus)의 어떤 별이 태양에 가려서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개기일식으로 인해 태양 원반
경계선 어두운 곳에서 태양 뒷면에 있는 별이 관측되었다. 이는 태양의 질량이 공간을 휘게 만들어 별 빛의 경로가 같이 휘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실제 밤하늘 천체에선 수십년이 흘러도 이 현상을 찾지 못하다가 60년이나 지난 1979년 에 이 Quasar 가 발견됨으로써 중력렌즈 현상이 우주의 기본질서임이 명백히 밝혀졌다. 아래 그림 보시면 A, B 이미지가 나타나는 현상을 잘 이해하실 수 있다.
<중력렌즈 현상>
이 Quasar 와 지구 사이에서 렌즈 구실을 하는 천체인 Lensing Galaxy는 지구에서 37억 광년 떨어져 있다. 이 Lensing 은하 이름은 YGKOW G1 이며 초거대 타원은하이다. 줄여서 G1으로도 부르기도 한다. G1 은하는 B 이미지와 1초각 떨어져 있다고 하므로 구별하긴 쉽지 않으나, 위의 SDSS 사진을 확대한 것 보시면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
있다. Quasar 에서 나온 빛이 지구를 향해 41억년을 직진하다가 Lensing 은하 G1 을 만나 두 빛은 헤어지고, 각기
다른 길을 찾아 지구를 향해 또다시 37억년을 여행한다. 그러나 그 37억년 동안 한 갈래 빛은 어디서 놀다 왔는지
다른 빛보다 지구에 1년 1개월, 날짜로는 417일 (오차 +/-3일 ) 이나 늦게 도착한다.
1979년 초반 Denish Walsh 등 미국, 영국 연합연구팀이 미국 Arizona 주에 있는 <Kitt Peak 국립천문대> 망원경으로 연구하던 중, 서로 6초각 밖에 떨어지지 않는 두 별을 찾아냈는데 신기하게도 두 별의 적색편이가 거의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별에서 나온 두 개의 이미지라는 가설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별이 중력렌즈 현상을 증명하는 최초의 천체라는 명예를 얻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우선 이 별이 발견된 해인 1979년 중반, 미국 New Mexico 주 VLA (Very Large Array) 전파망원경연구소의 David Roberts 는 B 이미지에서 가스 Jet가 분출하는 현상을 찾아냈는데, 이상하게도 A 이미지에선 나타나지 않았다. 만일 같은 별의 두 개 이미지라면 A, B 이미지 모두에서 가스 Jet 분출이 목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B 이미지와 Lensing 은하 G1 은 상당히 가까이 있는데 A 이미지는 Lensing 은하와 멀찌감치 떨어져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중력렌즈 현상이라면 Lensing 은하를 사이에 두고 A, B 이미지 사이 거리가 비슷해야 논리적일 것이다.
1983년에 와서 Marc Gorenstein 이 Jet 분출을 A 이미지 에서도 찾아내었고, 그 3년전인 1980년에 Young et al
이란 특이한 이름을 가진 학자가 Lensing 은하인 YGKOW G1 은 거대 은하단에 속해있는 한 개 은하에 불과한 것을 밝혀낸다. 이 은하단 내부의 각각 은하들도 이 Quasar 로부터 나오는 빛에 영향을 주는데, 은하단 각 부분 마다 밀도가 달라서 Quasar 빛에 주는 영향도 그 크기가 다를 것을 추정된다. 따라서 Quasar 로부터 나온 빛은 부분마다 밀도차이가 있는 은하단 내부를 통과하면서 굴절율이 달라지게 되고, 지구에서 볼 때 G1 은하로부터의 거리가 차이
난다는 설명이다 .
지구가 생긴 때부터 이 Quasar 로 부터 나온 빛을 지구는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3년 전인 2009년에 와서야 A 이미지의 빛이 B 이미지의 빛보다 417일 빨리 도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실 417일 이란 시차는 1.1 년 밖에 되지 않으므로 78 억년 이란 두 빛들의 여행 기간에는 비교할 수도 없다. 우리에겐 1.1년이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들 느낌으론 눈깜짝할 시간 조차도 되지 않을 것이다.
(3) 실상, 허상 그리고 인식론
그러면 A와 B 이미지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허상인가. 같은 대상에서 나온 빛이므로 두 개 이미지
모두 진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금 비틀어 생각하면 이는 제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문제이므로 답을
드릴 수가 없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진짜 Quasar는 Lensing 은하 뒤에 위치해 있는데, A, B 이미지는 진짜 Quasar 와 다른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를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더욱이 78억년 전에 나온 빛이므로 <지금 현재> 그들이 거기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혹시 재수 없게도 수십억년 전에 어떤 천체와 충돌해서 이미 가루가 되었을지도…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닌 대상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진짜 모습을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 시차를 당겨서 말씀 드리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사랑하시는 분의 모습이 진짜인가 아니면 허상인가.
비록 가까이 마주보고 있으나 상대방 얼굴에서 반사되어 나온 빛이 눈에 도착하는데 발생하는 시차와, 눈에서 대뇌
까지 연결된 신경을 통과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당연히 과거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과거 모습을 허상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제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 불교경전 인용해 말씀 드리면, 존재란 역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IV. Journey to Deep Sky
Black Hole 사진 찍기
(1) Black Hole 도 Deep Sky 인가
블랙홀이란 단어는 이제 천문학뿐만 아니고 일상 대화나 언론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일반 명사처럼 된지 오래이다.
따라서 보시는 분들께서 진부하게 느끼실 것 같아 지금까지 블랙홀을 소재로 기사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블랙홀을 사진에 담는다는 주제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흥미가 있으실 것 같아 이번에 기사로 만들어 보았다.
물론 우리 눈에 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블랙홀이 아니며, 빛을 내거나 반사하지 않으므로 사진으로 찍을 수도 없다. Jet를 분출하는 블랙홀을 사진으로 담을 수는 있겠으나, 천문대 망원경 정도라야 가까스로 가능하고 아마추어 망원경으로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분출되는 Jet 를 찍은 것이고 블랙홀 자체를 찍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곳에 블랙홀 존재가 없는 것은 분명 아니므로, 아마추어 망원경으로도
찍을 수 있는 블랙홀을 찾아본다.
그런데 이 칼럼의 소재를 블랙홀로 하려다 보니 문득 블랙홀은 딥스카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차제에 딥스카이의 정확한 정의를 찾아 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이며 아마도 많은 분들께서 딥 스카이란 성운, 성단,
은하들을 말한다고 알고 계실 것이다. 블랙홀을 어디에 끼워 넣어야 되는 지 고민된다.
몇 개 자료를 찾아서 서로 조금씩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종합한 딥스카이 정의를 보면, “우주에 존재하는 천체들 중에서 태양계 안의 천체 및 단일성, 다중성을 제외한 천체들”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남는 것들이 성운, 성단,
은하 들이다. 그러면 우리 은하는 딥스카이 인가 아닌가 ? 제 생각엔 우리 은하는 정의에 따르면 당연히 딥스카이
이다. 그러나 블랙홀은 특정 질량 조건을 충족하는 단일성 또는 다중성계의 어느 한 별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형태이며, 그 본래 모습 또한 단일성 또는 다중성계의 한 별이므로 블랙홀은 딥스카이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블랙홀 <그대도 저 먼 곳에> 있으므로 이 칼럼 주인공은 못되더라도 그냥 손님 정도로 너그러이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다.
덧붙여 정확한 영어 표기도 같이 알아보았다. <Deep-Sky Objects> 와 <Deep Sky Objects> 모두 사용된다.
전자가 정확한 영문표기인데, 하이픈 (Hyphen) 사용이 번거로우므로 후자를 많이 사용하며, 일반적으론 더 간단하게 줄여서 Deep Sky 로도 사용한다.
(2) 우리은하에는 블랙홀이 몇 개나 있을까
1. 우리은하 “블랙홀의 제왕” Sagittarius A*
지금까지 우리은하에는 19개의 블랙홀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 18개는 X 선을 내뿜는 이중성계이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은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우리은하에는 이보다 더 많은 블랙홀이 있다고 추정되는데 아직 발견 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여러분도 우리은하 내의 새로운 블랙홀을 찾으시어 “대한민국 블랙홀”이란 이름 한번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모든 은하의 중심부에는 블랙홀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은하도 예외는 아닌데, 우리 은하 중심부인 궁수자리 (Sagittarius) 에 있는 블랙홀은 별자리 이름을 따서 <Sagittarius A* >라고 명명되어 있다. 이 블랙홀은 파워로 보나, 위치로 보나 우리 은하내의 모든 블랙홀들을 거느리는 제왕이다. 질량은 태양의 4백만 배로 추정된다. 아래에 NASA가 제공한 Sagittarius A* 의 X선 사진 올려 드린다.
참고로 Sagittarius A* 를 읽는 방법은 <Sagittarius A Star> 이다. 한편 Sagittarius 의 라틴어 발음은 모르겠으나
영어발음은 <쌔짓-테어리어스>이다. 액센트는 “쌔”에 첫번째 강한 액센트 있고, “테어”에 두번째 약한 액센트 있다. 하이픈 표시는 t 가 두개 있어서 0.1~2초 정도 숨을 잠시 멈췄다가 “테어”를 발음한다는 표시이다.
<Sagittarius A* 의 X선 사진. NASA
화살표 끝에 있는 블랙홀에서 수십광년 지름으로 뜨거운 가스가 분출되고 있다>
2. 나머지 18 개 블랙홀 제국들
아래에서 Sagittarius A* 를 포함한 우리 은하 안의 블랙홀들 내역과 우리 은하에서의 위치를 살펴본다.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 나머지 블랙홀 18개는 모두 X 선을 내뿜는 이중성계 이다. 따라서 동반성을 볼 수 있으면 바로 그 옆에
있는 블랙홀도 같이 사진에 담을 수 있다. 물론 사진에 형상이 나타나진 않겠으나, 그 존재는 사진에 분명히 담겨
있을 것이다. 아래 내역을 살펴보시고 어느 블랙홀을 갖고 계신 장비로 사진에 담을 수 있는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은하에서 19개 블랙홀들의 위치. 블랙홀에 매겨진 각각의 번호를 아래 내역에서 찾으시면 됩니다>
<19개 블랙홀들 내역.
Number : 위의 그림에서의 블랙홀 번호
Designation : 명칭 또는 목록 번호
R.A. : 적경, Right Ascension
Dec. : 적위, Declination
Constellation : 소속 별자리
Spectral type : 동반성의 분광형 (O-B-A-F-G-K-M)을 세분화.
Magnitude : 동반성의 안시등급.
Period (hrs) : 이중성계 공전주기 (단위: 시간)
Distance (lys) : 지구로부터 거리 (단위 : 광년)
Type : 천체의 형태
Mass (Suns) : 태양 질량의 배수>
(3) 블랙홀 Cygnus X-1 과 동반성 HDE 226868
위에서 동반성이 제일 밝은 것은 8.9 등급의 <Cygnus X-1> 과 9등급의 <V4641 Sagittarii>의 두 개이지만,
궁수자리의 V4641 Sagittarii 는 적위가 – 25도로 낮아 남쪽 지평선 가까이 머물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사진 찍기는 적당치 않다. 반면에 Cygnus X-1은 적위가 35도나 되어 우리나라 9월쯤에는 밤 10시경에 천구상 가장 높은 위치에 도달하므로 관측에 용이할 것이다. 더욱이 거리가 6,100 광년 밖에 되지 않아 지구에 가까이 위치 하면서 그 이름
만으로도 한 몫 하는 천체이므로 이것을 잡아보기로 한다. 우선 성도부터 올려드린다. .
<백조자리 Cygnus 성도>
성도 우측하단의 백조자리 에타별 (Eta – η ) 에서 동북쪽으로 0.4도 가면 블랙홀 Cygnus X-1 이 사는 곳이다. 위의 성도에 Cygnus X-1 은 표시되지 않았다. Cygnus X-1 을 표시한 에타별 주변 밤하늘 모습도 올려 드린다.
<에타별 (Eta – η ) 에서 동북쪽 0.4 도에 블랙홀 Cygnus X-1 위치>
블랙홀 Cygnus X-1 의 동반성은 <HDE 226868> 또는 <SAO 69181> 로도 불린다. HDE 는 <Henry Draper Extension> 의 약자이고, SAO 는 <Smithonian Astrophysical Observatory Catalog> 이다. 다음에는 이 블랙홀 Cygnus X-1 과 동반성 HDE 226868을 잡은 사진을 살펴본다
<미국 Bruce Pipes 작품.
Tullip 성운 (Sharpless 2-101) 과 HDE 226868.
아래쪽 조금 큰 별이 HDE 226868. 사진에는 이 별 이름이 아닌, 그 바로 옆에 있는
블랙홀 Cygnus X-1 으로 표시됨.
Meade 8” LX 200R, f/7, Astro-Physics 0.67X telecompressor
SBIG ST-8300C / Orion ST-80 / Meade DSI using PHD
14 x 10 min (2 hrs, 20 min) >
위의 사진은 미국 Bruce Pipes 가 Meade 8” 와 SBIG ST-8300C로 찍은 사진이다. 물론 사진에는 동반성 HDE 226868 만 보이지만, 그 바로 옆 어딘가에 블랙홀 Cygnus X-1 이 있을 것이다. 목록번호 Sh 2-101로 불리는 Tullip 성운을 약간 광시야로 잡으시면 주변에 HDE 226868이 따라오고, 바로 그 옆 어디엔가 블랙홀 Cygnus X-1을 같이
사진에 담으실 수 있다.
1964년에 미국은 우주 전 방향을 탐색해서 우주 X선 지도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New Mexico주에 있는 <White Sand Missiles Range>에서 X선 탐사로켓을 발사했다. 이 탐사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천체 중 가장 강력한 X 선을
방출하는 것을 찾아내고 Cygnus X-1 이란 명칭을 붙였다. 이것은 엄청난 X 선으로 인해 발견 당시부터 불랙홀일 것이란 논란이 있었으며, 그 동반성 HDE 226868 역시 X선을 방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HDE 226868 은 지구에서 6,100 광년 거리에 있는 푸른색 초거성으로, 나이는 500만년으로 추정된다. 블랙홀 Cygnus X-1 주위를 공전하면서 광도가 변하므로 변광성에 속한다. 별을 구성하는 물질이 끊임없이 블랙홀 Cygnus X-1 로 빨려 들어가며, 그 물질은 블랙홀의 응축원반(Accretion Disk)을 형성한다. 이 별은 질량이 0 이 될 때까지
계속 블랙홀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Cygnus X-1 은 HDE 226868 와 3,000만 km 떨어져 있는데, 우주적 거리로 본다면 엄청 가까운 거리이다. 많이
보아오신 그림이지만, Cygnus X-1 소개 드리면서 이 그림 올리지 않는다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아래에 두 천체의 Illust 올려 드린다.
<왼쪽 블랙홀이 Cygnus X-1, 오른쪽 푸른별이 HDE 226868>
Stephen Hawking 과 친구인 Kip Thorne (미국 Caltech 교수 -2009 퇴임) 은 1974년 내기를 했는데, Stephen Hawking은 Cygnus X-1 이 블랙홀이 아니라는 쪽으로 걸었다고 한다. 1990년에 와서 Cygnus X-1이 블랙홀임이
확실하게 증명되자 Stephen Hawking은 내기에 진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내기 상품을 Kip Thorne 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내기의 상품은 당시 유행하던 남성잡지 1년 구독권 이었다고. 두 사람이 내기하면서 서명한 계약서가 Kip Thorne 의 연구실 벽에 붙어있는 것을 TV에서 본 기억이 있다.
하여간 위의 그림 우리은하 내의 블랙홀 분포지도를 보면 큰곰자리에 있는 4번 블랙홀을 제외하고 18개 모두 은하 원반 안에 있고, 더욱이 그 중 11개는 은하 중심부인 궁수자리 근처에 모여 산다. 따라서 궁수자리를 광시야로 찍으시면 11개 블랙홀 잡으시게 되고, 은하수를 전천으로 찍으시면 18개, 그리고 어안렌즈 사용하시면 19개 블랙홀 전부 한 사진에 담으실 수 있다. 말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라도 잘 건지려 하신다면, 그래도 Cygnus X-1이
제일 만만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래에 해상도 좋은 Chandra X 선 망원경 광시야 사진과 중심부 HDE 226868 을 확대한 것 같이 올려 드린다.
X 선으로만 본다면 우린 은하에서 제일 파워 있는 블랙홀 이므로 잘 살펴 보시고 氣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빨간 사각형이 HDE 226868 과 Cygnus X-1 있는 부분.
사각형 왼쪽은 Tullip 성운 (Sh 2-101). 사각형 오른쪽 밝은 별은 백조자리 에타별 ( η )>
<빨간 사각형 부분 확대. 두 별 중 아래쪽 별이 HDE 226868.
블랙홀 Cygnus X-1 이 잘 안보이시겠으나, “공즉시색” 이라고 생각하시면 마음 편하실 듯>
V.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조물주의 물수제비 놀이 – Messier / Messier A
(1) 조물주도 수제비 만들어 드시나 ?
<조물주께서 풍요의 바닷“물”에 던진 “수제비” 한조각>
지난호 Serial No 9 에선 조물주께서 Cassiopeia 여왕과 같이 만든 비누방울 (버블성운-NGC 7635) 이 어떤 모습인지 구경했었다. 한 때 조물주께서 태양계에 홀로 들르시어 외로이 <물수제비> 놀이 하신 흔적이 있다고 하므로 찾아가본다. 달 표면에 위 사진과 같은 물수제비 모양이 있는데, 풍요의 바다 (Mare Fecunditatis) 에 있는 Messier 와 Messier A Crater 이다. 달 뒷면은 너무 난타 당해 흉악한 몰골이라 이런 모양이 있는지 찾지 못했다.
물수제비에선 던지는 돌 (발사체) 모양도 중요하지만 성공의 관건은 아무래도 던지는 각도 (입사각) 일 것이다.
표면과의 각도가 너무 작으면 물 표면에서 그냥 튕겨나가 버려 예쁜 모양이 되지 않고, 너무 크면 당연히 물 속으로 곤두박질 치게 된다. 그러면 과연 얼마 정도 입사각이 되어야 제대로 된 물수제비가 될 수 있을까 ? 언젠가 기회
만들어 열심히 실험한 다음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소행성, 혜성, 운석 등의 충돌로 만들어지는 달의 Crater는 구멍처럼 “파이는 것” 이 아니고 “폭발” 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보통 달표면에 충돌했던 물체들은 초속 15~17 km 속도로 돌진하다가 달 표면에 부딪힌다. 이 속도는 시속 50,000~60,000 km 의 엄청난 속도로서, 충돌할 때 생기는 엄청난 폭발 에너지로 인해 충돌물 보다 직경이 10~20배나 더 큰 Crater 가 만들어진다. 충돌하는 물체가 주사위 모양이든 뾰족한 원뿔이든 상관없이 충돌로 인해 대부분
원형 Crater 가 생긴다. 그러나 타원형 Crater도 심심치 않게 있는데, 그 중에서도 Messier 와 Messier A Crater는
그 특이한 모양으로 인해 형성과정이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아래에 두 Crater 사진 올립니다.
<풍요의 바다 (Mare Fecunditatis) 에 있는 Messier 와 Messier A Crater.
사진- Tierry Legault>
(2) 평범한 실험, 비범한 결과
이를 밝혀내기 위해 1978년 NASA 소속 <Ames Research Center> 의 Don Gault 와 <Caltech>대학교수 John Wedekind 는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충돌 Crater 형태는 충돌물의 표면에 대한 입사각에 따라 달라진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얼핏 생각하기에 당연한 것을 뭐하러 비싼 돈 들여 실험까지 하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으나, 연구결과를 보면 그 때까지 일반적으로 생각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그렇지 않으면 비싼 연구비 낭비한 댓가로 바로 책상 없어졌을 것이다.
실험 방법은 몇 mm 직경의 구슬 및 원통형 발사체를 화강암 가루, 규사 (석영으로 이루어진 모래) 및 화산암 모래
등 세가지 표면에 초속 7 km 속도로 충돌시키는 것이었다. 초속 7 km는 시속 25,000 km 나 되는 속도이므로 일반 연구소 장비로는 어려운 실험이다. 연구목적은 이런 속도로 행성이나 달에 충돌하는 유성, 소행성, 혜성들이 비스듬한 각도로 상대 천체와 충돌하면 표면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론 입사각이 90도에서 점차 낮아질수록 Crater 도 점차 더욱 길쭉한 타원형이 되어 갈 것이라 생각되지만, 놀랍게도 표면과의 충돌각도가 45도 이하가 되어도 Crater 모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속 25,000 km 속도로 충돌하면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 “구멍이 파이는 것” 이 아니고, “폭발” 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제
상황에선 시속 50,000~60,000 km 속도로 달 표면에 충돌하므로 폭발 효과는 더 심할 것이다.
입사각이 아주 낮은 각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타원형이 되기 시작했으며, 발사체의 파편들로 인해 입사 방향 및 주변에 작은 분화구들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렇게 비스듬한 각도로 부딪혀도 진입속도가 워낙 빠르므로 폭발이 일어난다. 그러나 충돌체가 달 표면에 스치면서, 표면에 접촉하는 부분은 충격으로 폭발하는 동시에 물체의 윗부분은 깨져나가 물체의 진행방향 앞에 또다시 충돌하게 된다.
발사체의 입사각이 낮아질수록 Crater 의 분출물과 광조가 점점 더 확연히 나타났고, 입사각이 15도 이하가 되면
드디어 Crater 가 길쭉하게 되기 시작한다. 입사각이 1~5도 정도로 아주 낮게 되면 비로소 Crater 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아래 사진에서 보시는 <옆으로 쪼갠 땅콩모양> 이 된다. 놀랍게도 이런 땅콩 모양 분화구는 희귀하지만,
달을 물론, 화성 및 금성에서도 발견된다. 이 연구로 인해 달의 가장 기묘한 Crater 인 Messier 의 형성과정을 알게 된 것이다.
<오른쪽 Messier Crater 의 땅콩 모양이 확실히 보인다
사진-NASA Lunar Reconnaissance Orbiter>
(3) 같은 자리 두 번 맞추는 절묘한 기술 Messier A
달의 동쪽으로부터 1도에서 5도 사이로 거의 달 표면을 스치면서 접근하던 충돌물이 풍요의 바다에 이르러 표면과 충돌, 폭발하면서 길쭉한 Messier 를 만들었다. Messier 는 사진처럼 <땅콩>
모양으로 길이 11 km, 폭 8 km, 깊이 1.25 km 이다.
첫번째 폭발의 충격으로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충돌물은 Messier Crater 전방 20 km 에서 두번째 로 충돌하면서 Messier A 를 만들었다. 나머지 잔해들은 관성에 의해 진행방향이던 서쪽으로 계 뻗어가며 120 km 에 달하는 광조를 형성한다. Messier A 는 크기가 13 x 11 km 로서, 같은 지점에서 충돌이 두 번 일어난 Double Crater 이다.
원래 작은 분화구가 있었는데, 이보다 더 큰 물체가 나중에 같은 자리에 충돌해서 Messier A를 만들었다고 한다.
같은 자리 두 번 쏘는 양궁선수 실력보다 한 수 위인 듯 싶다.
<같은 자리에 두 번 충돌했다는 Messier A (사진 왼쪽). 사진-NASA Apollo 11>
Messier Crater 가문의 주변 소형 Crater 는 맏형인 Messier A 를 포함해서 Messier B/D/E/G/J/L 으로서 모두 7 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IAU (국제천문연맹- Int’l Astronomical Union) 가 Messier G 인 5 째 동생을 Lindbergh 집안으로
입양하고, Lindbergh Crater 로 개명시켰다. 따라서 지금 남아있는 형제들은 아버지 Messier 를 빼고 Messier A/B/D/E/J/L 의 6 명 뿐이다.
Charles Lindbergh (1902~1974) 는 잘 아시는 것처럼 최초로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성공한 미국의 영웅이다.
그는 정부 요청으로 미국을 위해 많은 민간 외교업무를 수행했고,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평생을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살았었다. 그러나 그도 절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는데 대서양 최초 횡단 후,
2세 밖에 안된 그의 첫째 아들이 납치되어 결국 유해로 발견된 슬픈 일이 있었다. IAU 가 Messier G를 Lindbergh Crater 로 개명한 시점이 그가 미국의 영웅이 된 직후인지 아니면 한 참 지나 그가 아이를 잃고 난 이후인지, 슬픈
일이라 더 알아보진 않았다. 그러나 Lindbergh Crater 가 그를 위한 것이든, 그의 아들을 위한 것이든 하여간 달에
영원히 남아 있을 지명이 두 분 모두에게 위로가 되면 좋은 일일 것이다.
한편 18세기 독일 물리학자 Franz Von Gruithusen 은 그 광조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인공물, 즉 외계인이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불과 50년 전인 1960년대 Valder Axel Firsoff 라는 천문학자는 광조가
달의 지표면 운동으로 인해 Messier A 가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남긴 흔적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아니면 말고”
식 주장은 아마 우리나라 여의도에서 배워간 것일 수도. 그런데 대형 Crater 중에서도 타원형을 여러 개 찾을 수
있다. Tycho, Kepler, Proclus Crater 등이 대표적이고, 초대형으로는 Mare Crisium (위난의 바다) 도 있다. 이 네가지 Crater 사진 올리면서 이번 칼럼 마무리합니다.
<Tycho Crater. 사진-Hubble 망원경>
<Proclus Crater. 사진-Apollo 15> <Mare Crisium 사진-Apollo. 우주선 번호 정보 없음>
Astro New <끝>
블랙홀 이야기 재미있습니다. 잠시 더위를 잊고 몰두해 읽었는데 아는게 너무 없네요. 이런이런,,, 그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