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체 스케치를 주제로 이렇게 별 대책 없는 하루살이 칼럼을
메시에 110편 완주를 목표로 하루하루 써나가고 있지만
2009년까지만 해도 천체 스케치는
그저 ‘하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막상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일이었다
매일 빼먹지 않고 어학 공부를 하면 언젠가는 귀가 뚫리고 입이 트인다는 것을 모두 알지만
그냥 ‘그래 맞는 얘기지’ 하고 할 생각을 잘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내가 가장 기뻤던 이유는 더 이상 미술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에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었으니까)
별나라 선배들께 ‘스케치는 안시관측의 왕도’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정작 그 형님들도 스케치는 잘 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싫던 나도, 스케치가 아니더라도 할 일은 많을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놀지는 않았다)
그러다 2009년 5월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평생 보지 않던 달을 보다 보니
대체 이 복잡한 구조를 어떻게 관측기를 쓰나..
(Theophilus 크레이터)
몇 장을 글을 써야 구덩이 하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림 그리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게 더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마침 아파트 1층 현관 광고판에 붙어 있던 ‘미술 과외 합니다’ 전화번호에 연락하여
당장 그 주부터 우리 집에서 반년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몇 시간씩 재료 쓰는 법을 배웠다
흰 종이, 검은 종이, 샤프, 파스텔, 펜촉, 찰필, 지우개..
(Theophilus 습작 - 흰 종이에 샤프, 조강욱)
고등학교때 진절머리 나게 싫어했던 미술을 스스로 간절하게 배우게 되다니.
참으로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어설픈 솜씨로 달과 NGC 몇 개를 그려본 후로,
맑은 여름밤의 벗고개에서 처음 마주한 메시에 대상이 17번이었다
그동안의 나는 실적 지상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사람이라,
관측지에서 무조건 많이 보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있었다
무조건 새로운 대상들을 최대한 많이 찾아보고
‘오늘은 은하 40개 성단 20개 봤어’ 이런 것으로 뿌듯해 하는 것 말이다
(뭐가 뭐였는지 하나도 기억도 못하면서)
너무나 익숙한 밝은 발광성운인 M17이지만
그림을 그리려니 쉽지 않았다
어설픈 솜씨로 처음 시도한 메시에 스케치가 복잡한 성운이었으니 잘 될 리가 없지..
하지만 스케치의 1차 목적은 그저 멋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며 강제로 오랫동안 대상을 보게 되면
그 대상을 이전보단 훨씬 자세히 볼 수 있게 된다.
(자세히 볼 생각이 있던 말던) 나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 없이 말이다
그림을 잘 그리던 못 그리던 스케치를 시도하며
1차 목적은 자동으로 달성하게 되는 것.
15년을 익숙하게 보던 대상인데, 한 시간을 성운의 모양을 잡고 있으니
(그림을 그리면 상대성 이론이 적용되는지 시간이 몇 배로 빨리 간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또는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구조들이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씩 떠오른다
(M17 구조 설명)
검은 호수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 한 마리..
그 목에 감긴 진주 목걸이
몸통 안의 bright patch들
그 머리 위의 밝은 별과 성운기
주변시로 보이는 백조 머리 뒤의 후광 (마치 예수의 성화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안시로는 절대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꼬리 뒤의 길고 얇은 호 모양의 성운까지.
[ M17, 백조 목에 진주 목걸이 - 양평 벗고개에서 조강욱 (2009) ]
집에 오는 길.
어둠이 내린 345번 지방도를 달리며..
지금까지 십수년간 천체관측을 하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 좋은 포만감에 그냥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하룻밤에 50개를 봐도, 100개를 봐도 느낄 수 없었던 만족감.
오늘은 처음으로 진짜 별 좀 본 것 같다
관측지에서 고작 성운 하나 보고서도 기분이 좋아서
차창을 열고 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오면서
메시에 대상을 하나씩 모두 그려 보아야겠다고 계획하게 되었다
(이렇게 오래 걸리리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망원경을 만진 뒤로 14년간 강박관념으로 가지고 있던
‘하루에 한 개 이상 무조건 새로운 대상 찾아보기’도
그날부로 갑작스런 이별을 맞게 되었다.
아무 미련 없이
Nightwid 無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