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북극권 원정 - #6. 5일차(나르빅-키루나) : 폭풍의 하늘
2015. 5. 10 (日) 조강욱
1. Prologue : 모든 것의 발단
2. 원정 준비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원정
3. 1일차(서울-키루나) : 라플란드로 가자
4. 2일차(키루나) : 오로라와의 조우
5. 3~4일차(키루나-아비스코) : 태초의 얼음 호수
6. 5일차(나르빅-키루나) : 폭풍의 하늘
7. 6일차(오슬로-스발바르) : 뭉크를 찾아서, 북극을 향해서
8. 7일차(스발바르) :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9. 8일차(스발바르-오슬로) :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시공간
10. 9~10일차(프랑크푸르트-한국) : 10일간 비행기 10번 타기
11. Epilogue : 진인사대천명
============================== 5일차 ==============================
출발 전에 계획했던 것들 중에 별보기와 관련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 첫번째는 학교 다닐 때 책에서만 보던 그 피요르드 해안에 가 보는 것.
'혹시 기회가 되면' 가 보기로 했는데.. 지금 있는 얼음 호수에서 80km만 더 서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생존에 중요한 조식 뷔페를 포기해야만 했다
밤사이의 환상적이던 하늘에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이번 원정은 날씨운이 엄청나게 좋다
스웨덴 국경지대의 민가. 호주에서도 궁금했지만.. 이 사람들은 뭐 해서 먹고 살까? (부러워서 그런다)
국경에 민감한 우리들.
스웨덴 - 노르웨이 국경은 검문소 같은 사무실이 하나 서 있기는 한데
제지하는 사람도 차단기도 없다
코딱지만한 'Norge' 간판 하나..
마치 이런 느낌이다.
차 타고 가다가 '환영합니다 여기는 고양시 입니다' 하는 시 경계 간판 본 것 같은.
부럽기도 하고.. 북쪽에 지금도 펼쳐지고 있을 황홀한 관측지들이 탐나기도 하다
국경을 넘으니 갑자기 길이 좋아졌다. 노르웨이가 고속도로 제설은 훨씬 잘한다
오늘의 드라이버
길 뿐이 아니라 풍경도 훨씬 거대하고 장엄해졌다
합성 사진?
차창 밖의 풍경에 감탄하는 사이 노르웨이 피요르드 해안에 도착했다
아우디 오너 느낌으로다가 한 컷!
렌터카 반납까지는 5시간이 남았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일단 갈 데까지 가 보자. (간 만큼 또 되돌아 와야 하여 무작정 달릴 수는 없었다)
달력에서나 볼 법한 풍경들이 무심한 듯 차창 밖으로 지나간다
살짝 얼어있는 바닷물에 반사된 아련한 풍경이 현실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든다
합성사진 두번째. 그냥 큰 달력 앞에서 사진 찍은 것 같다
합성사진 + 고루한 포즈
여기서 오로라가 뜬다면 피요르드 해안에 반사된 기가막힌 광경을 볼 수 있을텐데
여기는 스웨덴에 비해 구름의 두께가 사뭇 다르다
2차대전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다리
고속도로 길가의 이름없는 공터의 평범한 풍경.
동네 뒷동산
2001년 사자자리 유성우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유성우는 밤새 엄청났지만, 나중에는 환호성을 지르는 것도 지쳤던 그 밤처럼
그냥 입만 벌리고 그네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사진들은 모두 김동훈님의 작품. 물 위에 반영되는 경치를 담는 것을 특히 좋아하시는 듯)
카오디오 대신 블루투스 스피커
오늘은 차의 퍼포먼스에 걸맞는 운전사를..
피요르드 반영사진 애호가, 반사 김동훈 선생
끊임없이 밀려오는 달력 그림들을 넋 놓고 보며 달리다가,
렌트카 반납 시점이 아슬아슬할 무렵 U턴을 했다. 이제 왔던 길을 300km 달려서 렌터카 제한 시간 내에 집에 가야 한다
나는 밤샘의 여파로 조수석에서 자고 있는 도중에
말만 고속도로지 그 좁고 구불구불한 빙판길을
코드라이버도 없이 한솔형님 혼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서 돌아왔다
(계기판 속도계 참조)
아무데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잘 자는 능력이 여기서도 발휘되었다는..
폭풍 드라이빙을 하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졸다 보니 다시 나르빅(Narvik)에 도착
키루나에서 철광석을 실은 기차가 도착하는 종착역이자 북극의 부동항 나르빅.
키루나와 비슷한 인구 2만의 작은 항구도시다
국경에서 본 풍력발전소를 다시 지나서
스칸디나비아 산맥을 넘어서
평야 지대로 향할수록
구름은 점점 사라진다
스웨덴을 관측 포인트로 정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아비스코를 넘어서
얼음 호수를 옆에 끼고
그 많던 구름들을 모두 떠나 보내고, 다시 키루나의 스키장을 맞았다
스웨덴은 주유는 물론 계산도 셀프로 한다. 동네 아저씨의 도움으로 겨우 계산 완료.
방금 뽑은 새 차가 하룻밤새.. '우리 차가 달라졌어요'
오늘은 키루나에서의 마지막 밤, 마지막 오로라다
내일은 새벽 6시 비행기로 북극으로 출발할 예정..
오늘은 마지막으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한솔형님의 광란의 질주로 무사히 정시에 렌트카를 반납하고
라면밥으로 늦은 아점.
이틀간 차에서 몇 시간 자고 550km를 이동하고서는 뻗어 자고 있는데
형님들이 막 깨운다.
오로라 경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오로라 예보를 보니 기껏해야 Kp 3~4 정도를 오르내리던 예보가
갑자기 최고 수준인 Kp 9를 밤새도록 찍는 것으로 예보가 바뀌었다
나는 잠에 취해서 오로라 보이면 깨워주세요.. 하고
두 분이 부산하게 관측 준비를 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또 잠이 들었는데
저녁 8시쯤, 전화를 받았나.. 아님 알람으로 일어났나 모르겠는데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오로라 예보가 최고수준으로 떠 있는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거지
폰의 오로라 어플은 온통 빨간 색으로 뒤덮여 있다
(평시(?)에는 녹색, 오로라가 활발하면 노란색으로 그래프가 그려진다.
빨간색 그래프는 3개월간 오로라 예보 모니터링을 하면서 한 번 본 적도 없었다)
참조용으로 보던 NOAA 위성 사진도 난리가 났다
내가 미쳤지 지금 잠을 자고 있나..
혹시 클라이막스가 지나갈까 하여
정신없이 방한복을 입고 뛰어서 8시 20분, 관측지에 도착했다
내가 자고 있던 사이 먼저 관측지에 도착하셨을 두 분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혹시.. 설마? 내가 자고 있던 중에?
역시나, 이미 거대한 폭풍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갔다 한다
하늘에는 오로라의 흔적이 가득할 뿐 Kp Level 9의 위용은 느끼기 힘들다
또 오겠지.. 초조한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오로라를 기다린다
노르망디 상륙을 기다리는 상륙정의 병사들처럼.
(출처 : 라이언 일병 구하기 맨 처음 어딘가)
긴장된 공기.. 쉬지 않고 전 하늘을 육안으로 탐색할 뿐
다들 말이 없다
9시. 사방에서 밝은 오로라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형체를 키워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 김동훈 作, 폭풍의 서막 ]
전방위적으로 동시다발로 일어나고 있어서
어느 한 곳을 집중해서 주시할 수도 없다
어젯밤 그렇게 보기 힘들었던 오로라 색이
오늘은 밝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숲 속의 가로등은 10시에 소등된다)
녹색 뿐이 아니라 붉은 빛도 너무나 쉽게 보인다
아.... 이건 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 김동훈作, 어디 눈을 두어야 할지 ]
키루나 두번째날 순식간에 보여주고 끝난 오로라 스톰과 달리
지금 보고 있는 스톰은 한 시간째 끊임없이 몰아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폭풍이 아닐까.
오로라 관측은 망원경과는 전혀 다른 즐거움이다.
대체 하늘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기쁨이 얼마나 더 많이 남아 있을까..
예정 시간을 10분 넘긴 10시 10분, 온 산의 가로등이 동시에 소등이 되었다
그리고.. 설산이 어둠에 잠김과 동시에 오로라도 모두 소등.
좀 쉴까 하니 10시 반쯤 다시 오로라 등장.
다시 온 하늘을 물들이며 새벽의 여신이 저녁부터 바쁘게 움직인다
[ 김동훈作, 인해전술 ]
커튼, 열차, 폭포, 폭풍, 용틀임, 깃발, 비행, 불꽃.... 너무나 다양한 오로라가 곳곳에서 산재하여
하나 하나 다 구경해 줄 수도 없다
[ 김동훈作, 오로라 백화점 ]
키루나 두번째 관측일에 본 오로라 폭풍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그 오묘한 색을 기억에 각인시키려 무진 애를 썼는데.. 그 노력이 무색해져 버렸다
밤새도록 눈 앞에서 춤 추고 있는 것을..
사람의 머리도 사진의 노출 시간처럼 일정 시간 이상 눈으로 그 빛을 받아들여야지만
그 기억이 머리속에 각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스케치도 한 장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침 흘리며 봤지만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다
11시 45분, 1시간이 넘게 공연되던 오로라 극장 2부도 끝이 났다
이 와중에도 이틀간의 강행군에 피로가 몰려와서 서서 졸다가
2부 쇼가 끝난 틈을 타서 막간을 이용해 짐을 싸러 숙소로 돌아갔다
12시 10분,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천정에서 붉은색의 오로라가 번쩍 번쩍 꿈틀댄다
아....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숙소에 들어가서 짐 챙긴다고 의자에 앉았다가 그대로 취침.
아래는 같은 시각 혼자서 관측지를 지키던 동훈 형님의 연속 촬영 사진이다
[ 김동훈作, 폭풍의 하늘 ]
내가 숙소에 들어간 직후 천정에서 엄청난 오로라가 쏟아져 내렸다 하는데..
그건 보지 못했다
[ 김동훈作, 하늘 꼭대기에서 쏟아져내리는 오로라 ]
아마도 머리 위에서 폭죽이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었을듯.
짐 안 싸고 고작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을 거였으면 그냥 오로라 밑에서 잘 걸 그랬네..
의자에 앉아서 거의 두시간을 졸다가 새벽 2시, 목이 아파 깨어났다
혹시나 하여 밖에 나가보니 하늘은 다시 조용하다
정신을 차리고 길 떠날 짐을 꾸린다. 얼마 뒤 동훈 형님도 촬영 장비를 모두 접고 철수.
잡화점에서 산 휴대용 손저울을 정말로 요긴하게 사용했다. (아래 사진의 김동훈님 손에 있는 것)
30번쯤 무게를 재 보다 보니 이젠 저울 없이도 19.8kg, 7.9kg을 맞추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항공의 탁송화물은 짐 하나당 20kg, 기내반입은 8kg으로 제한되어 있다)
새벽 6시10분 첫 비행기. 새벽 5시에 숙소에서 예약한 콜택시를 타고 출발해야 한다
(공항이 5시 10분에 문을 열기 때문에 더 일찍 출발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짐 싸다가 궁금해서 새벽 3시쯤 숙소 문을 열고 하늘을 보니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선명한 오로라가 너울댄다
붉은색 스톰이 아무렇지 않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길다란 용 한 마리가 꿈틀대고 한 바퀴 돌고 온갖 재주을 부리며 동쪽으로 사라졌다
그게 이 날 대박 오로라의 마지막이었다
사실 이 날의 오로라는 올해 들어 가장 강력한 오로라 폭풍이었다
보통 오로라가 조용한 날은 아래 지도 정도의 예보가 나온다
(녹색의 두꺼운 선은 오로라가 잘 보이는 지역, 녹색의 점선은 오로라 관측의 남방 한계선이다)
오로라가 활발한 날도 남방 한계선은 키루나에 살짝 걸쳐 있는 정도인데
하지만 이 날의 상황은..
오로라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온통 뒤덮고 영국, 폴란드 등 중위도 지방에서도 화려한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관측의 남방 한계선은 무려 남부 유럽까지.
고려시대 관측 기록에 적기(赤氣)를 보았다는 날은 아마도 이런 날이었겠지..
몇 %의 확률로 이런 대규모 오로라 폭풍을 볼 수 있는 것인지,
우리가 얼마나 행운이 충만했던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맑은 하늘, 대박 오로라,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우리가 그 곳에 있을 확률..
스웨덴에서 5일 밤을 보내며 매일 매일이 맑았다
사실 3일만 성공해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도의 차이는 있어도 매일밤 오로라를 구경하고
그리고 마지막날 떠나기 직전에 초대형 폭풍까지!
몇년치 운을 한 방에 끌어다 쓴 느낌이랄까?
행복하고 기분 좋다가도,
별나라에서 행운의 절대량은 상수 K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마저 든다
이 날의 대박 하늘은 우리만 본 것은 아니었나보다
APOD에도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본 사진이 두 개나 게재되었다
[ P-M Hedén作, Aurora in the Backyard (스톡홀름 인근) ]
(출처 : http://apod.nasa.gov/apod/ap150319.html)
[ Mia Stålnacke作, A Flag Shaped Aurora over Sweden (키루나) ]
(출처 : http://apod.nasa.gov/apod/ap150330.html)
위 사진은 무려 키루나에서 찍은 사진이다. 침엽수들 빼고는 지형 지물이 찍히지 않아서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우리가 있던 곳에서 멀지 않았음은 확실할 것이다
내가 본 오로라를 어떻게 표현해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중에 북극에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한솔형님 소개로 들어보게 된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에서
비장하게 시작하는 첼로 독주의 첫 부분이 하늘 이곳 저곳에서 피어나서 요동치는
오로라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너무나 닮아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래 유튜브 링크의 동영상을 틀어놓고 그 아래의 오로라 연속촬영 사진을 보자
https://youtu.be/MrjeyNVNKb4?t=3m45s
(위 연주에서 오로라가 연상되는 부분은 맨 처음 부분과 3분 49초부터 시작되는 첼로 독주 부분이다
번지르르하게 잘생긴 카퓌송의 연주가 왠지 요요마보다 오로라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 김동훈作, 여신의 강림 ]
새벽 5시, 출발 시간에 맞추어 모든 짐의 무게를 20kg과 8kg에 완벽하게 맞추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오로라 폭풍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일본인 신혼부부로 보이는 젊은 커플과 한 차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일본에선 신혼여행으로 오로라를 보러 가는 여행상품이 많다)
Nightwid 無雲
1. Prologue : 모든 것의 발단
2. 원정 준비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원정
3. 1일차(서울-키루나) : 라플란드로 가자
4. 2일차(키루나) : 오로라와의 조우
5. 3~4일차(키루나-아비스코) : 태초의 얼음 호수
6. 5일차(나르빅-키루나) : 폭풍의 하늘
7. 6~7일차(오슬로-스발바르) : 뭉크를 찾아서, 북극을 향해서
8. 8일차(스발바르-오슬로) :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시공간
9. 9~10일차(프랑크푸르트-한국) : 10일간 비행기 10번 타기
10. Epilogue : 진인사대천명
호수도 오로라도 사진도 멋지네요.ㅎㅎ